언제나 되도록 얼마간의 애매함에 몸을 두고, 미덕의 가면까지 쓰려고
하는 것이 악의 술책이다. 자신의 향락욕에 대해서는 인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하고, 증오나 질투에 대해서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야심을 활동욕이라 얼버무리고, 태만을 영달욕에 대한 반감에서라고,
아니, 심지어는 신의 뜻에 완전히 맡겨 버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다만 때때로
대담하기 짝이 없는 철학자나 현실주의의 정치가가 나타나서 그들의 진짜 악의
얼굴을 드러내고, <일체의 가치 전도(니체)>를 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미 건전한 회귀가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악쪽에서도 당분간은 가면을 다시
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가면은 이내 벗겨 떨어지고, 사람들은 적나라한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샅샅이 눈앞에 볼 수가 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철학이나 윤리로써 기독교를 대치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결정이 난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는 본격적인 재생으로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