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5. 티벳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눈

별관신사 2013. 5. 29. 02:48

5. 티벳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눈



티벳 사람들은 죽음과 중간계를 신비스럽게 여기지도 않고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
기지도 않는다.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는 티벳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보는지, 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연속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생생하
게 보여 준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태양계의 구조나 계절의 변화를 종교적인 믿음의 대

상으로 삼지 않는 것처럼, 수없이 여러 번 태어난다는 견해가 결코 종교적인 믿음이 아
니다. 티벳 사람들은 생명체의 연속적인 삶, 즉 일정한 패턴을 따라 진행되는 죽음과
중간계와 환생을 당연한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명료한 의식을 가진 채
로 중간계를 탐험하고 돌아온 깨달은 성자들이 전하는 중간계에서의 체험담을 믿는다.

티벳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달에 다녀 온 우주 비행사들이 달이 어떻더라고 말하는
것을 믿는 것처럼, 그들 정신세계 비행사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티벳 사람들
은 또한 정해진 방법에 따라 명상함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티벳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이런 불교적인 관점에 따라 영위해 나간다. 세상을 이해하

기 위해서 배우고, 그리고 윤리적인 행위와 올바른 마음 씀씀이와 비판적인 통찰력을
통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생을 준비하는 데 일생을 보낸다.
티벳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
만, 아주 다른 부분도 있다. 그들도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죽음을 인생의 종말에 찾아오

는 비극으로 본다. 또한 사고로 비명횡사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심지어는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임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더 살아 보려고 한다. 이런 인간적인 차원
에서 보면, 죽음을 고통 없는 망각으로 여기는 서구 유물론자나 현실주의자들 보다 티
벳 사람들이 오히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무감각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죽음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 생에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나쁜 습관을 가지고 그릇된 행동을 일삼은 사람은 죽음의 문을 통과한
다음 이 생에서 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죽

음을 몰래 숨어서 기다리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심술궂은 존재로 본다. 티벳 사람들은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신 야
마에 대한 관념을 인도에서 물려받았다. 야마는 들소 머리에 양 손에는 해골 바가지가
달린 가시돋힌 곤봉과 올가미를 들고 검푸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야마는 발기한 좆을 드러내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들소 뒤에 우뚝 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소름끼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자 차문다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
도 있는데, 차문다는 야마의 에너지를 여성으로 인격화시킨 상징이다. 야마 밑에는 그
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졸개들이 있다. 그들 죽음의 사자들은 여기저기 떠돌

아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야마 앞으로 끌어온다. 죽음의 사자가 부르면 아무도 거
역하지 못한다. 지하 세계로 끌려가 문도 없고 창문도 없는 쇠감방에 갇힌다.
야마는 쇠감방에 갇힌 죽은 자의 선악을 심판한 다음, 선한 행위가 월등히 많았으
면 하늘 나라로 보내고 악한 행위가 많았으면 동물 세계나 지옥으로 보낸다. 그러나 동
정심과 아량이 있고, 지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가능성 있는 영혼이라면 인간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한다. 영적이 수행에는 하늘 나라 보다는 인간 세계가 더 적합하
기 때문이다. 티벳 사람들은 야마를 대단히 두려워하며, 붓다와 보살들이 자신들을 야
마의 손에서 건져 줄 것을 기대한다. 티벳 사람들은 야마가 붓다에게 굴복하는 과정을
가면 무도회를 통해 묘사하는 축제를 벌인다. 그때 울긋불긋한 의상을 입고 무시무시

하게 생긴 가면을 쓴 승려가 춤을 추며 야마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러면 붓다의 화신인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만주스리(文殊菩薩)나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아발로키테스바라
(觀世音菩薩)가 나타나 야마를 굴복시킨다. 특히 아발로키테스바라(觀世音菩薩)는 위대
한 성자이며 티벳의 영적인 구원자인, 역사적인 실존 인물 파드마 삼바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죽음을 인격화시킨 야마의 모습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 무서운 것은
야마가 아니다. 악한 사람이 받을 심판과 그들이 처할 운명이 무서운 것이다. 티벳 사
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이 무한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생명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무로 돌아갈 수도 없다고 믿는다. 인간의 생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인간

은 항상 어떤 상태이든 관계의 영역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처해 있는 관
계의 영역 속에서 내적인 자유를 성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에서 비롯되는
속박의 굴레에 끝없이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반복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영원히 피하
지 못한다.

인간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상태와 기쁨이 넘치는 상태의 중간에 놓여 있는 존재
다. 인간은 베푸는 행위, 도덕적인 행위, 그리고 관대함 등의 미덕을 쌓음으로써, 또 비
판적인 지혜를 계발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명상 수행을 통해 지적인 능력을 강화시킴으
로써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태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엄격하게 프

로그램된 본능적인 반사 행위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 주어져 있
다. 인간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
무한한 행복을 누림과 동시에 다른 생명체들을 도와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는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죽는 것, 즉 인간 상태로 존재하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잃어버리고 원하지 않는 비참한 상황에 수없이 반복하여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
로 비극 중에 비극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깨달음과 자
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고 살

다 죽은 사람의 상태는, 죽으면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죽
자 마자 하늘 나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그런 사람은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질지 모르며,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없는 고통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티벳 사람들은 이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가는 삶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죽음
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다음 생에 처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도록 한다.
티벳 사람들의 진한 종교성과 영성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원 지대의 눈 덮인 산이
아니라 바로 이런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티벳 사람들은 죽음을 오히려 삶에 밀
접하게 관련된 힘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음을 악하고 무자비한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착하게 살도록 하는 힘, 즉 바람직한 태도와 선한
행동을 강화시키는 힘으로 본다. 또한 죽음 자체를 삶과 동떨어진 별도의 절대적인 실

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죽음조차도 이렇게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티벳 사람들의
정신적인 태도는 항상 현존하고 있는 자유, 즉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근거로 존재하
고 있는 자유와 관련하여 죽음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티벳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처해 있
는 삶의 상황, 그리고 깨어 있는 상태의 감각과 그 감각이 인지하는 대상들이 견고한
실재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 내가 하는 행위,
나의 느낌,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변하지 않는 본성[自性]을 갖고 있

는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두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은 언제든지 무로 돌아갈 수 있는 잠재적인 무이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그 모든 것
이 당장 해체되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손에서 떠난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몸
과 마음에서 떠나 텅 빈 마비 상태가 될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현존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상상을 뛰어 넘는 자유
를 누린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본성은 언제나 자유라는 사실
을 안다. 그리고 모든 혼란은 이 세상을 고정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로 보는 무지
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깊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

어간다. 사람들은 보통 습관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무
엇을 하든지 완전히 그의 자유 의사에 따라 행동한다. 죽음에 대한 이런 고차원적인 이
해는 자신을 '비우고 죽이는 지혜'를 인격화시킨 무시무시한 죽음의 신 야마와 관련되
어 있다.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죽음의 신 야마에 대한 명상을 통해 만물의 '비어-있음
'[空性]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티벳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티벳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는 기쁨과 생동감이 넘친
다. 그들은 고정된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살며, 무슨 일에서든지 자유
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 생을 붓다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한 수행에 바친다. 결코 물질을 추구하거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

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자신의 잠재적인 진화 가능성을 꽃
피우기 위해, 내면의 빛에 따르는 지적인 삶을 살아 왔다. 그리하여 독특한 문화를 만
들어 냈다. 티벳 문화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죽음이 늘 현존하고 있다는 생생한 깨달음
과,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자유로움에서 분출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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