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8월 3일

별관신사 2014. 6. 23. 04:45

예레미야 51:17.18(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다.)

예술이 인간을 자기 이상으로 높여서 보다 순수하고, 보다 강하고, 보다
위대한 것으로 하는 한, 당연히 그 만큼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극치의 예술일 경우라도 기껏해야 놀이에 불과하며, 대체로

인간 속에 관능성을 일깨워 조장함으로써 영혼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악의 원인을 그 근원에 들어가서 깊이 탐색한다면, 극히 많은
경우에, 과도의 관능성(가장 넓은 의미에서의)이 그 근저에 있고, 그리고

그것이 신에 대한 불성실이나 자신의 보다 나은 자아와 인간성에 대한
배신자로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주의, 아니 동물적인 삶의 감정은 대다수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때에 따라서 크거나 아니면 작은 역할을 이행한다. 이처럼 위험한
것을 저 우연에 내맡기고 싶지 않으면 그것과 근본적으로 대결해야만 한다.
일반적이고 온건한 유물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이것들은 결국 아무래도 좋은

것, 즉 생활을 밝게는 하되 성격에 하등의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닌 이른바
<사소한 일>로 간주된다. 이같은 견해는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에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사상이며, 현대에도 우리는 강하게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사고방식의 주된 결점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데에 있다. 더구나 개인이나
전국민을 근본적으로 타락시키고 철저하게 신에게서 떼어놓는 데에 이보다 더
큰 영항력을 가지며, 또 이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이미 태고의

말씀(창세기 4:7)이 이 위험과 그것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을 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와 같은 이기주의적 경향을 버리고, 확고한 결심과, 이
경향에 강하게 반대하는 정신적 관심과, 그리고 진정한 친절을 갖는 것이
이 위험으로부터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다수는

그러한 방법을 취하는 대신에 문제를 바르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눈앞의
인상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그 때문에 왕왕 눈을 감고 무서운 내적, 외적
갈등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러한 갈등의 모습은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속에서 또 테니슨의 <국왕목가>에서는 더욱 아름답고 또 웅대하게
묘사되어 있다. 단테는 베아뜨리체와 삐까르다와 같은 고상한 모습을 만들어
냈지만, 이 문제를 진정으로 포착하지는 못했다. 최근의 시인들의 대부분은

예술의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악화시켜 버렸다. 반대로
톨스토이는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와 기쁨은
그것이 선을 이탈한 단순한 미와 기쁨으로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들을 포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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