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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사랑의 적이 아니다.

미움은 사랑의 적이 아니다. 미움은 사랑을 아름답게 마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감미료와 같다. 미움은 사랑의 배경이다. 이때 그대는 분노를 통해 자비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 분노는 자비와 반대되지 않는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의미가 그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는 적이 아니다. 그들은 친구다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 숨은 조화속에서 그들은 하나가 된다. 분노라는 원수가 있다. 그것을 이용하라. 그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라. 미움을 통해 그대의 사랑을 더 깊은 차원으로 성장시켜라. 미움을 토양으로 삼아라. 미움은 사랑의 토양이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숨은 조화다. 원수를 사랑하라 대립되는 것을 이용하라. 대리되는 것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배경이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

그대들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마다....

그대들을 분열된다. 믿음은 분열을 만들어 낸다. 온 세계는 믿음 때문에 분열된다. 믿음은 분열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힌두교도이고 어떤 이는 마호맷교도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적이다. 왜 그대들은 적인가? 그대들의 믿음때문이다. 믿음은 갈등을 만들어 낸다. 어리석은 설명과 이념들이 갈등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현상을 보라. 만일 거기 설명이 없다면 누가 힌두교도이며 누가 마호멧교도인가? 그리고 그대들이 어떻게 싸울 수 있으며 무엇때문에 싸울 것인가? 사람들은 언제나 철학 위에서 싸워왔으며 피를 흘리고 서로 살해하였다. 다만 어리석은 믿음을 위하여, 그리고 만일 그대가 믿음을 들여다 본다면 그대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믿음이 아니라 상대방의 믿음의 어리석음을 ! 그대의 믿음은 신성한 것이고..

장자(莊子) 2021.01.08

자이나 교인들 또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들은 마하비라가 마지막 예언자라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의 티르탕카(자이나교에서 개달은 스승을 일컷는 말. 여울을 만드는 자 라는 뜻이다. 마하비라 이전에 23명의 전법자가 있었다고 하며 마하비라는 24조다.) 는 없다. 이슬람 교인들은 모하메드를 마지막 에언자라고 하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신의 독생자라고 한다. 이제 더 이상 아들은 없다. 모든 문이 닫혔다. 이렇게 도덕주의자들이 항삼 문을 닫아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안전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오면 순간에서 순간을 사는 예언자가 오면 모든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다. 그대는 어느정도 안정되어 있다. 그대는 규칙들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대는 분명히 조화를 얻었다. 그런데 다시 예언자가 오면 그는 모든것을 혼란시킬 ..

합일의식이란?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어떠한 비밀 장치도 필요치 않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신앙심도 어떤 신비주의 전문용어도 어떤 위험한 비술도 필요치 않다. 만일 실재가 정말로 경계없는 상태라면 이를 부정한다면 상대성이론 생태과학 유기체 철학및 동양의 지혜등에 지혜를 돌리는 꼴이 된다. 합일의식이란 바로 그것을 깨닫는 자연 스러운 자각상태이다. 한마디로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의 자각이다. 캔 월버.

인문학 강좌 2021.01.06

그대는 끊임없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에게 일관성을 기대한다. 그리고 숨은 조화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일부이지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 사회는 인위적인 현상이다. 사회는 모든것이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근거로 한다. 사회는 부동의 도덕과 율법을 만들었다. 마치 모든것이 변하지 않는 것 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똑같은 도덕율이 수천년 동안 지속된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도덕은 변함없이 유지된다. 모든것이 끊임 없이 변화하는데 소위 도덕주의자들은 계속 똑같은 설교를 늘어 놓는다. 그들의 설교는 시대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일관성을 맹목적으로 유지한다. 이렇게 시대와 어긋나는 일이 계속된다. 모하메드 시대에 아라비아 지역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네배나 더 많았다. 전사였던 아라비아인들은 끊임 없이..

종교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은 표면적으로만 조화롭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중심에서 조화롭다. 종교적인 사람은 모순될 수 밖에 없다. 반면 도덕적인 사람은 항상 일관된다. 도덕적인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가까운 제자들 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 지 점칠 수 없었다. 예수라는 사람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한편 사원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환전상들을 내쫓았다. 그는 자비에 대해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사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형명적이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그는 아주 일관되지 못한 것 처럼 보인다. 러셀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을 썼다...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실재가 무경게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nirvanna) 해탈(moksha) 해방(rellease) 깨달음(enlightenment)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 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 부터의 해방이다. 이 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통상 합일의식이라고 불리는 무경계 자각을 탐구할 준비가 된 셈이다. 캔월버의 무경계 중.

삶의 의미를 묻는 그대에게...

당신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과 삶의 의미는 너의 것이어야 한다. 히말라야 역시 당신을 도울수는 없다. 오로지 살아감으로써 삶의 신비는 더러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져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을 다른 곳에서 찿지말라는 것이다. 삶을 나에게서 찿지 말라. 삶을 경전에서 찿지 말라. 이들은 모두 당신을 삶에서 더울 멀어지게 할 뿐 결코 삶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들은 당신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기는 하지만 삶이 무엇인지 말려주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마음이 점점 더 죽은 지식으로 채워질 수록 당신은 더욱 우둔하고 무감각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간을 우둔하게 하며 인간을 짖누르는 무게가 된다. 지식은 에고(ego)를 강화시..

모든 사물은 공이다.

모든 사물은 공이다. 모든 사물은 둘이 아니다. 또는 모든 사물은 상호 침투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차이점을 부정하고 개별성을 무시하고 세상을 온통 한데 뒤섞인 걸쭉한 액체처럼 묘사하려는게 아니다. 세상은 온갖 유형의 특징과 표면과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단일한 무봉의 장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라. 당신의 손은 분명 머리와 다르고 머리는 다리와 다르고 다리는 귀와 다르다. 하지만 그 모두가 한몸을 구성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체가 다양한 부분들로써 스스로를 표현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경계의 영토에서는 모든 사물과 사건이 똑같은 하..

실재란 사고(思考)의 공(空)이자 사물의 공(空)이다.

실재란 思考의 空이자 사물의 空임을 견지하는 불교의 심오한 空의 교의이다.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구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것 처럼 사물이란 단지 경험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경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思考의 空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가 정상적인 지도제작이고 실재 위에 경계를 덧씌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사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와 사물화(事物化) 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위해 던진 경계라는 그물에 붙인 두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캔월버의 무경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