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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즉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에도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잠잘 때 그대는 잠잔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에도 그대는 잠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붓다 예수 클레이토스 그들 모두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깨어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깊은 곳에서 그대는 계속 잠자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대는 내면에서 꿈을 꾸고 있다. 마음속에 수많은 상념이 지나가는데 그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대는 몽유병환자 처럼 행동한다. 몽유병 환자들을 본적이 있는가? 그는 잠자면서도 이일 저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이것이 몽유병이라고 불리..

불화속의 조화 대립속의 합일이 모든 신비의 열쇠다.

만물은 변화속에서 안식을 발견하나니 자신과 불화를 이루는 것이 어떻게 자신과 일치되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악마는 신과 일치하고 신은 악마와 일치한다. 이것이 악마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수금(竪䔷)과 할의 경우처럼 구부러진 등에도 조화는 있다. 음악가는 활과 수금으로 연주를 한다. 대립은 표면적인 현상이다. 표면에는 마찰과 투쟁 불화가 있지만 그로부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온다. 대립은 화합을 가져오고 불화에서 아름다운 조화가 비롯되나니...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죽음이 삶의 일이다. 삶의 최종적인 결과가 죽음이다.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다. 활의 이름은 삶이지만 그 일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수금과 같다. 활의 이름이 삶이라면 수금의 이름..

삶의 속성.

어느날 저녁 위대한 회교시인 아와디 커만은 문 앞에 앉아 항아리위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대한 수피 신비주의자인 샴스 에 타브리지가 그 앞을 지나 갔다. 삼스 에 티브리지가 그 신의 행동을 보고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이 대답했다. 물항아리 속의 달을 바라 보고 있습니다. 삼스 에 티브리지는 커다랗게 웃기시작했다. 시인은 기분이 꺼림직해졌다. 군중이 몰려 들었다. 시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웃는것 입니까? 왜 당신은 나를 조롱합니까? 삼스 에 티브리지가 말했다. 네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곧장 하늘의 달을 쳐다보지 않는가? 달은 저기 있다. 만월이 저기 있다. 그런데 시인은 물 항아리 속에 비춰진 달을 바라보고 있다. 진실을 경전이나 철학속에서..

삶은 미로이다.

삶은 미로이며 기차의 철길과는 다르다 삶은 결코 궤도위를 달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삶의 아름다움이며 위대함이며 시이며 음악이다 삶은 언제나 경이이다. 만약 당신이 안전함과 확실함을 구한다면 당신의 눈은 닫혀질 것이다. 당신은 점점 더 적게 놀라게 될 것이다. 결국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되면 당신은 종교를 잃을 것이다. 종교는 경이로와 할 수 있는 가슴을 열어 준다. 종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에 대한 감수성이다. 안전을 구하지 말라.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충고를 구하려 하지 말라.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바그완이여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켜 주십시요 . 당신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는 고정된 유형을 만드는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당..

삶은 불확실하다.

매 순간 당신은 불확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삶은 도박이다 앞으로 무슨일이 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앞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만일 삶을 예측할 수 있다면 삶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일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정확히 되어 나가고 모든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고 기계이다. 오직 기계에게만 모든것이 안정되어 있고 확실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자유롭다. 자유는 불완전과 불획실을 필요로 한다. 진정한 지혜를 지닌 인간은 어떠한 도그마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항상 망설인다. 그는 바라보고 나서 비로소 반응한다. 노자는 말했다. 나는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망설이며 살면서 부단히 변모 한다. 또한 나는 어떠한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매..

모든 사물은 본래의 기원으로 돌아간다.

또한 돌아 가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삶을 이해하게 된다면 죽음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본래의 근원으로 부터 멀어져 감이며 죽음은 집으로의 회귀이다 죽음은 추하지 않다. 죽음은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오직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을 짖누르고 억압하지 않고 산 사람들 에게만 아름다운 것이다. 삶을 아름답게 산 사람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의 삶이 축복 이였다면 죽음은 축복의 절정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당신의 삶이 어떠했든 죽음은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당신의 인생이 고통스러웠다면 죽음은 고통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알고 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 그러나 당신 자신은 당신의 초월성과 진정한 본성과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다. 이것이 삶의 유일한 비극이다. 당신은 여러가지 변명거리를 찿으려고 하겠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진정으로 슬픈 일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당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문제들이 이 근본적인 자기무지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오쇼라즈니쉬.

카르마가 작동하는 것을 보는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단지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기만 해도 우리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는 지 분명하게 볼 수 있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해쳤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지 않 는았는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비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카르마이다. 우리의 습관이나 공포 또한 카르마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행했던 말과 행위 생각의 결과이다. 만약 우리의 행위를 면밀히 살펴보고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행위 가운데 계속 반복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행할 때 마다 고통과 고난이 야기되고 우리가 긍적적으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결국 행복을 불러 들인다. 티벳의 지혜 중.

인도인의思惟 2021.01.25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많이 이야기 한다.

그런데 아무도 보리달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제자들이 독살을 기도 했을 때 의식을 잃고 무덤속에 묻혔다가 나중에 의식을 되찿고 무덤을 빠져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발 한짝은 무덤속에 남겨두고 다른 한짝은 주장자에 걸고 그곳을 떠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보리달마는 히말라야 만년설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아무런 무덤도 사원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보리달마는 자신이 죽은 뒤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죽어서 숭배를 받고싶지 않다. 이는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네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이리라.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는 영원한 히말라야 만년설 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난날의 카르마를 비춰준다. 우리가 이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나 재난으로 보지않을 것이고 고통을 형벌로 간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겪고있는 과거 카르마의 결과 진실로 우리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고통을 온갖 부정적인 카르마를 쓸어내는 빗자루라고 말한다. 하나의 카르마가 종결되는 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좋은 카르마의 결실인 행복은 우리가 잘 이용하지 못하면 곧 지나가 버릴 것이고 나쁜 카르마의 인과응보인 불행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는 놀라운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 카르마는 키베트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생생하고도 실재 적인 의미를 지닌다.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