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로 층만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광기로 충만한 시대에 살아남도록 브랑카 부부가 내어준 방은 남향이었다.
오늘 아침은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막힌다. 비록 몸은 쇠약해졌지만, 펜과
양피지를 쥐는 순간, 집필 의지가 되살아난다.
나는 1637년에 일어난 일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해는 여러 면에서 정말
비극적인 해였다. 스페인이 구교측에 가담하여 참전한 30년 전쟁이 8년 째
접어들었다. 젊은 병사들은 싸구려 마라카 포도주로 심기를 달래며 먼 이국
땅에서 꽃처럼 스러져 갔다. 더구나 전쟁의 포화는 이제 스페인 본토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이같은 비극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고향인
벨몬데에서 일어난 사건은 일찌기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
했던 전쟁공포중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트레도에서 우에스카까지 긴 '여행을 했던 안토니오 삼촌에게서 들은
얘기다. 어느날 술에 만취된 두 명의 병사가 수당을 달라는 핑계로 아버지의
집에 왔다. 그들은 숨겨놓은 포도주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집을 샅샅이
수색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자, 그들은 노기가 층천하여 총검을 휘둘러 대었다.
이 와중에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목숨을 잃으셨던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위안이 되지 못했는데 글올 쓰다 보니 간신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한 처녀작에. 나는 '영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젊은 국왕 필럽
4세가 통치하던 스페인은 정복한 영토들을 식민지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가재정은 모두 군대에 쏟아 붓고, 더욱 나쁜 일은 추락해가는
국가의 위신이었다. 가두에는 모금상자가 놓이고 악화되어 가는 국가재정과
대외채무를 개선하기 위해 집집마다 돈을 거두어 들였다. 세상은 영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지력과 흔들리지않는 명성을 겸비한 위대한 인물. 국가의
수호신이며 모든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
나는 '영웅'의 둥장인물을 통해 이 장벽에 대해 말했다. 강은 얕은 여울목이
나올 때까지는 물길이 거세고, 사람은 그 그릇이 알려질 때 가서야 존경을
받는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력과 용기도 필요하지만, 숨길 것은 숨기고
비밀로 해야 할 부분은 비밀로 해 둘 필요도 있다. 감정을 드러내면 의도가
밝혀지고, 언제 술수에 걸려들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이 책의 초판을
라스타노사 신부에게 바쳤다_ 신부는 나의 필명을 보고 놀랐다. '고결한 사람
노렌죠 그리시안'이라고 돌아가신 부친의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책에서 나온 조그만 수입은 교회로 들어갔다. 나는 공적을 인정받거나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또 하나 내가 얻지 않은 것이
있었다. 책을 냈다는 기쁨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교회의 출판 허가를 얻는
일을 그만 잊고 말았다. 이 일은 신임 총대리 주교의 노여움을 샀고 '이
중대하고 반항적인 분차를 엄중히 감시하라.' 는 명령이 직속상사에게
떨어졌다.
총대리 주교는 '세고비아 몬트로'라는 엄격한 신부였다. 이 인물은 교회의
정상에서 20년간 내게 수많은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이었다. 이 사건은 그
서막이었다. 그러나 처녀작 '영웅'이 발표되자, 세상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역설한 나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내 이름도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나의 작품을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몬트로 신부의 편지는 대부분 이단을 고발하는 말투로 씌여 있었다. 교구 내
교회장상들 모두에게 배포된 이 편지에는, <교회는 신의 대변자로 사람들을
교화시킬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시안은 자신의 이름을 속였을 뿐
아니라, 자칭 고결한 사람이라고 치켜 세움으로서 선의 노여움을 샀고, 경건한
교구민들에게 독선적인 신념을 전파하였다.> 라고 씌여 있었다.
주교는 내게 예수회에 먹칠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경죄로 문책하려고
위협하였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양심을 따라 진실을 말한 것은
불경죄가 될 수 없었다. 나의 사명은 오직 세상을 관찰하고, 쓰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하기 조차 괴로웠지만, 집필
활동은 계속 했다.
그 후 2년 후에 출판된 다음 작품 '정치가'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책의 주인공은 1452년에 태어나 1516년에 서거한 아라곤의 왕으로
가톨릭의 왕으로 알려진 '페르디난도'였다. 1492년 유명한 콜롬부스의 대항해를
재정 지원했던 사람이 바로 그의 아재 '이사벨라'왕비였다 '정치가'는 옛
스페인의 영화를 기리고. 오늘날의 국가 행정에 대한 나의 소견을 밝힌
것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곧 몬트로 신부로부터 계고장이 날라들었다.
어쩌면 내가 받아야 할 당연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1640년, 39세에, 나는 마드리드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영역에서 부패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원래는 2주 동안만 대학 강의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2개월 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때마침 마드리드에서는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방청객들 틈에
끼어 권위있는 법관들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사믓 궁금했다. 하지만 재판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인 편견을 드러내었다. 나는 사악한 권위자들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인간을 판단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싶어 하지 않는 꼴이었다. 나는 법조계에 대한 항의문을 만들어 배포하였으나.
그 부패를 막지는 못했다.
같은 해, 이번에는 카타로니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카다로니아 상인들이 독립과 면세를 주장하면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들은 민중을 선동하고 곧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같은 국민들끼리 싸우는 광경을 보고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아팠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약하나마 이 분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나의 탄원을
들어 줄 만한 권력자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사망자는 계속 늘어났다.
우에스카 교구로 돌아온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카타로니아에서 목격한
현실을 기록했다. 젊은 병사들과 욕심많은 상인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란에 휩쓸린 죄없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통증이 온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흔탁해지고 도덕은 무너져 내렸다.
여기 내 교구만 살펴보아도. 지도자들 사이에 불신감이 팽배해져 갔다. 교회의
상층부에서조차 부유한 지주와 속이 시커먼 정치가들 사이에 소모적이고
이기적이며 추악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아남은 것 자체가 절박한 문제이고, 교훈과 층고가
절대로 필요하다. 신께서는 기필코 이런 광기에 찬 세상에서 얻은 교훈을
빠짐없이 기록하라고 나를 선택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거짓말도 필요하다. 오늘의 목격자는 내일의 증인이다. 사람을
도우려면 신중해야 한다. 남의 흉사를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힌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쓸데없이 장황한 말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지 않는다. 누구와 말을 할 때 상대를 빤히 쳐다보며
말해서는 안 된다. 익명은 때로 귀증한 것이다. 대세에는 역행하지 않는 쪽이
안전하다. 말을 높인다고 모두 호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비밀은 말학지도
듣지도 말것 취소할 수 없는 것은 공표하지도 말 젓,. 전성기는 누구에게나 찾
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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