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필요성
캬이 호! KYAI HO!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민감하게 깨어있을 것을 촉구하는 만트
라이다.
행복한 수행자들여, 잘 들으라!
마음 은 이렇다느니 또 저렇다느니 말도 많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적구나.
잘못 알고 있든지,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는구나.
그들은 마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치 못한 연고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궤변을 늘어 놓고 있구나.
딴 곳에 정신을 팔면 마음을 깨닫지 못하나니,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섯 존재 차원의 미혹된 세계(三界六道)를
고통스럽게 방황하느니라.
마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느니라.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인생을 탕진한다. 생존하기 위해 필
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구하며 고귀한 인생을 헛되이 보
낸다. 그러나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수없는
삶을 반복하면서 계속 잃고 또 잃는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를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현실과 계속 싸우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
기 때문이다. 최고의 깨달음 상태 즉 성취 가능한 궁극적인 목
표가 이미 성취된 상태로 늘 현존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두
려워하고 싸우고 고통 받으며, 반대 방향을 향해 치달리는 것이
다.
성문(聲聞)과 독각(獨覺)도 깨달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부분적일 뿐
한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자구(字句)와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투명한 빛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성문sravaka은 석가모니 붓다의 말을 직접 들은 제자 또는 아
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수행자를 가리키고, 연각緣覺
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독각pratyekabuddha은 다른 사람에게 배
우지 않고 혼자 수행하여 인연의 원리를 깨우친 사람을 가리킨
다. 이들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대에 대승
불교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譯者註) 성문과 독각은 상당한 경
지에 도달한, 소승 불교의 2종류 수행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에
고에 탐닉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벗어났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통찰도 상당히 깊다. 하지만 완전한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
지 못했다. 왜곡된 본능의 힘이 아직 남아 있고, 거친 차원의 육
체와 미묘한 차원의 몸을 궁극적인 실재의 투명한 빛 속에 완전
히 융합시키지 못했다.
성문과 독각은
주체와 대상의 분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중도주의자(中論學派)들은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극단주의에 갇혀 있고,
주술적 탄트라 수행자들은
제사 드리는 자와 제사 받는 자를 구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마하 탄트라와 아누 탄트라 수행자들은
깨달음의 세계와 자신의 마음을 따로 보는 이원론에 갇혀 있다.
이들은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본다.
모든 것이 하나 임을 깨닫지 못한다.
윤회와 해탈이 한 마음 속에 있는데,
이들은 이 수레 저 수레 바꿔타면서
윤회의 세계를 부질없이 방황한다.
파드마 삼바바는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개인주의자(小乘)들을 비판한다. 그는 나가르주나(龍樹)
가 토대를 세운 중론(中論) 철학을 신봉하는 보편주의자(大乘)
들은, 상대적인 세계와 궁극적인 실재를 지나치게 구별한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는 또 주술적인 행위를 능사로 삼는 탄트라
수행자들은 수행자인 자신들과 제사와 수행의 대상인 신적인
존재를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보다 높은 차원의 요가 탄트라 수행자들도 비판한다. 그들에게
도 위대한 만다라의 세계 또는 순수한 환경인 완전한 깨달음의
영역과 자신들의 마음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태도가 남아 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그치고,
그대 자신의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이 가르침을 받아 들여,
모든 것이 지금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깨달으라!
마하무드라(大印) 곧 위대한 완성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라!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서 모든 수행 체계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
는 궁극적인 탄트라를 제시한다. 궁극적인 탄트라 수행자들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미묘한 차원을 수행을 한다. 이들은
이것 저것 갈라 봄이 없는, 모든 것이 녹아 하나로 융합된 비이
원성을 성취하는 수행을 한다. 이것이 위대한 완성이라고 부르
는 마하무드라(大印)의 가르침이다.
사마야 갸 갸 갸! SAMAYA GYA GYA!
캬이 호! KYAI HO!
기쁨이 충만한 상태로, 민감하게 깨어있을 것을 촉구하는 만트
라이다.
행복한 수행자들여, 잘 들으라!
마음 은 이렇다느니 또 저렇다느니 말도 많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적구나.
잘못 알고 있든지, 부분적으로 밖에는 모르는구나.
그들은 마음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치 못한 연고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궤변을 늘어 놓고 있구나.
딴 곳에 정신을 팔면 마음을 깨닫지 못하나니,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섯 존재 차원의 미혹된 세계(三界六道)를
고통스럽게 방황하느니라.
마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느니라.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인생을 탕진한다. 생존하기 위해 필
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구하며 고귀한 인생을 헛되이 보
낸다. 그러나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수없는
삶을 반복하면서 계속 잃고 또 잃는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게
된다. 자기를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현실과 계속 싸우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
기 때문이다. 최고의 깨달음 상태 즉 성취 가능한 궁극적인 목
표가 이미 성취된 상태로 늘 현존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두
려워하고 싸우고 고통 받으며, 반대 방향을 향해 치달리는 것이
다.
성문(聲聞)과 독각(獨覺)도 깨달음을 말하지만,
그들의 깨달음은 부분적일 뿐
한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자구(字句)와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투명한 빛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성문sravaka은 석가모니 붓다의 말을 직접 들은 제자 또는 아
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수행자를 가리키고, 연각緣覺
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독각pratyekabuddha은 다른 사람에게 배
우지 않고 혼자 수행하여 인연의 원리를 깨우친 사람을 가리킨
다. 이들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대에 대승
불교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譯者註) 성문과 독각은 상당한 경
지에 도달한, 소승 불교의 2종류 수행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에
고에 탐닉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벗어났다.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통찰도 상당히 깊다. 하지만 완전한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
지 못했다. 왜곡된 본능의 힘이 아직 남아 있고, 거친 차원의 육
체와 미묘한 차원의 몸을 궁극적인 실재의 투명한 빛 속에 완전
히 융합시키지 못했다.
성문과 독각은
주체와 대상의 분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중도주의자(中論學派)들은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극단주의에 갇혀 있고,
주술적 탄트라 수행자들은
제사 드리는 자와 제사 받는 자를 구별하는 마음에 갇혀 있고,
마하 탄트라와 아누 탄트라 수행자들은
깨달음의 세계와 자신의 마음을 따로 보는 이원론에 갇혀 있다.
이들은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본다.
모든 것이 하나 임을 깨닫지 못한다.
윤회와 해탈이 한 마음 속에 있는데,
이들은 이 수레 저 수레 바꿔타면서
윤회의 세계를 부질없이 방황한다.
파드마 삼바바는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는 이원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개인주의자(小乘)들을 비판한다. 그는 나가르주나(龍樹)
가 토대를 세운 중론(中論) 철학을 신봉하는 보편주의자(大乘)
들은, 상대적인 세계와 궁극적인 실재를 지나치게 구별한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는 또 주술적인 행위를 능사로 삼는 탄트라
수행자들은 수행자인 자신들과 제사와 수행의 대상인 신적인
존재를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보다 높은 차원의 요가 탄트라 수행자들도 비판한다. 그들에게
도 위대한 만다라의 세계 또는 순수한 환경인 완전한 깨달음의
영역과 자신들의 마음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태도가 남아 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그치고,
그대 자신의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이 가르침을 받아 들여,
모든 것이 지금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깨달으라!
마하무드라(大印) 곧 위대한 완성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으라!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서 모든 수행 체계의 정점에 자리 잡고 있
는 궁극적인 탄트라를 제시한다. 궁극적인 탄트라 수행자들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미묘한 차원을 수행을 한다. 이들은
이것 저것 갈라 봄이 없는, 모든 것이 녹아 하나로 융합된 비이
원성을 성취하는 수행을 한다. 이것이 위대한 완성이라고 부르
는 마하무드라(大印)의 가르침이다.
사마야 갸 갸 갸! SAMAYA GYA GYA!
'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점 시간의 문] (0) | 2013.07.07 |
---|---|
자세한 동일시(同一視) (0) | 2013.07.07 |
이것이 그것이다 (0) | 2013.07.05 |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길 (0) | 2013.07.04 |
[무서운 모습의 불보살들로 이루어진 만다라] (0) | 2013.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