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배려, 논리 및 온전한 정신(우리의 나날의 일을
위한)을 가지고 연습되어야 할 사고의 의의와 전혀 뜻없는 사고에 대해 탐색하기로 하자. 그
두가지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사고가 닿을 수 없는 훨씬 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생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생각은 어떻게
우리의 모든 행동을 제약하는가 하는 복잡한 구조 전부를 이해하도록 해보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아마도 생각이 발견한 일이 없는 어떤 것, 사고가 열어 주지 못한
어떤 것과 만날는지도 모른다.
왜 사고가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다지도 중요하게 되었는가-관념으로서의 사고, 우리의
뇌세포 속에 축적돼 있는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고가 왜 중요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당신들 대부분은 일찌기 그런 질문을 묻지조차 않았을는지도 모르고, 또 만일 물었다면 이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중요하지 않아-중요한 건 감정이야.> 그러나 당신이 그 둘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만일 사고가 감정에 연속성을 주지 않으면, 감정은
금방 꺼져 버린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고되고, 지루하고, 두려운 삶
속에서, 왜 생각은 그렇게 어이없는 중요성을 갖는가? 내가 스스로 묻고 있는 것처럼
당신도 스스로 물어 보라-왜 우리는 생각의 노예인가-조직할 수 있는 교활하고 영리한 생각,
일들을 시작할 수 있는 생각, 그 많은 것을 발명해내고, 그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그렇게 많은
공포와 불안을 낳은 생각,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또 그것 자체의 꼬리를 좇는
생각-어제의 쾌락을 즐겼고 현재 속에서 그 쾌락에 연속성을 주었고 미래에도 그렇게 하게 될
생각-항상 활동적이고, 수다를 떨고, 움직이고, 구성하고, 가져가고, 보태고, 가정하는 사고의
노예인가?
관념은 우리에게 행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여러 분야의 지성인들에 의해서 책
속에 그렇게도 영리하게 표현된 관념 말이다. 그 관념들이 교활하고 기묘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것들이 담겨 있는 책들을 숭앙한다. 우리가 그 책들이고, 우리가 그
관념들이며, 우리는 그것들에 의해 아주 무겁게 제약되어 있다. 우리는 영원히 관념과 이상을
토론하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견해를 내놓는다. 모든 종교가 그것 자체의 교리, 그것 자체의
법식, 신에게 이르기 위한 그것 자체의 발판을 갖고 있으며, 생각의 처음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그 관념들의 전건축물을 묻는다. 우리는 관념을 행동으로부터 분리했는데, 왜냐하면
관념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고 행동은 언제나 현재의 것이기 때문이다-즉 삶은 언제나
현재이다. 우리는 삶을 두려워하며 그러므로 관념으로서의 과거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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