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물질적인데 왜냐하면 생각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마루, 벽,
전화들이 물질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은 물질이다. 어떤 패턴 속에서의 에너지 작용이 물질이
된다. 에너지 있는 곳에 물질 있다. 모든 삶이 그렇다. 우리는 생각이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생각은 물질이다. 생각은 이데올로기처럼 물질이다. 어디에 에너지가
있으면 그건 물질이 된다.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있을
수 없으며, 둘 사이에 조화가 있을수록 뇌세포들은 더 균형있고 더 활동적이다. 생각은 쾌락,
고통, 공포의 패턴을 세워 놓았고, 수천년 동안 그 속에서 기능하고 있으면서 그걸 깨뜨리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생각이 그 패턴을 낳았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사실이 생각에 의해 보여질 수 없다. 그것(새로운 사실)은 나중에 생각에 의해
언어상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새로운 사실의 이해는 생각에 대해 리얼리티가
아니다. 생각은 어떤 심리적 문제도 풀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하고, 아무리 영악하고, 아무리
박식하고, 생각이 과학을 통해, 전자 두뇌를 통해, 강제나 필요성을 통해 만들어낸 구조가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어떤 중대한 질문에도 결코
대답할 수 없다. 낡은 두뇌는 살아 있는 삶의 엄청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각은 어떤 것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 없는 사물을 보기 때문에 뒤틀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별난 트릭을 부릴 수 있고, 그리하여 그것은 의존할 게 못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생각하는 이유, 당신이 사용하는 말, 일상 생활에서의
당신의 행동 방식, 당신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 당신이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 당신이 걷는
방식, 당신이 먹는 방식들의 전구조를 이해한다면-이 모든 것을 당신이 안다면 당신의 마음은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속임 당하는 것도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요구하고 예속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다-그것은 비상하게 조용하고 유연하고, 민감하고,
고독하며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
당신이 완전한 주의의 상태에 있을 때 관찰자, 사고자, 중심, <나>가 없어지는 걸 주목한
일이 있는가? 그런 주의 상태에서 생각은 시들기 시작한다.
만일 누가 어떤 것을 아주 분명히 보고 싶어한다면, 그의 마음은 모든 편견, 지껄임, 대화,
이미지, 그림 따위들이 없이 아주 고요하지 않으면 안된다-즉 보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의 처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묵 속에서이다-그러니까
찾고,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할 때는 볼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신이 <생각의 처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조용할 때에만, 당신은, 그
침묵으로부터 어떻게 생각이 형성되는가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한 앎이 있으면 생각을 통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우리의 생각을 통어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이건 좋은
생각이니, 나는 이것에 관해 많이 생각해야 해. 이건 추한 생각이니, 나는 이걸 억제해야 해.>
한 생각과 다른 생각, 한 욕망과 다른 욕망 사이에 항상 싸움이 계속되고, 한 쾌락이 다른
모든 쾌락을 지배한다. 그러나 생각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생각 속에 모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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