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때가 왔다. 온 세상에 파국이 닥쳤다.
파국의 신호탄은 인간이 사는 대지에 밀어닥친 2년 간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 험악한 젙쟁이
할퀴고 지나간 인간 세상에는 패륜과 유혈의 아비규환만이 남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형
제들끼리 서로 싸우며, 오누이가 살을 섞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남편을 버리고 자기 아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참혹한 3년 전쟁이 끝나자 뒤이은 3년은 내내 겨울만 계속되었다. 여름은 자취를 감추었고 온
세상엔 눈보라만 세차게 불었다. 그나마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이었다. 3년의 기나긴 겨우이 끝나자 늑대 시대 라고 불리는 세상 최후의 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더 이상 여름도 겨울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의 마지막 날이 저물 무렵, 해를 뒤쫓아 달리던 늑대 스콜은 마침내 그 해를 붙잡아 꿀꺽
삼켜 버렸다. 아스가르드는 해를 물어뜯는 스콜의 게걸스런 어금니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늑대 하티도 달을 붙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해와 달이 사라지면서 별들도
하늘에서 사라져 칠흑 같은 암흑이 대지를 덮쳤다.
대지가 떨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다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었고 산은
울부짖었으며, 바위는 무너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굴레와 사슬이 풀려 나갔다. 신들이 섬 한가
운데 묶어놓았던 사나운 늑대 펜리르는 마침내 끈에서 풀려 나와 으르렁거리며 아스가르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얄라르라고 불리는 붉은 수탉이 거인들을 향해 투쟁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홰를 쳤다.
그러자 오딘의 전사들이 모여 있는 발할라궁에서도 황금볏을 지닌 닭 굴림캄비가 결전의 날을 알리는 울음을 울었다. 닭은 지옥에도 있어서 요란을 떨며 죽은 자들을 깨워 일으켰다.
일어나 최후의 날을 맞아라 !
바다 밑에 도사리고 있던 우주 뱀 요르문간드가 대지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비틀자 세계의 모
든 바닷가에는 어마어마한 해일이 밀어닥쳤다. 먼바다에서는 죽은 자들의 손톱과 발톱으로 만든 배 나글파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 안에는 흐림이란 거인을 선두로 하는 거인 군단이 타
락 천사와 같은 으스스한 몰골을 한 채 도열해 있었다. 나글파르 호의 행선지는 거인과 신들의 결전장인 비그리드 평원이었다.
한때 신들 편이던 로키도 아들의 내장을 끊어버리고 동굴을 나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지옥
에서 건져올린 귀신들을 잔뜩 태운 전함을 몰고 비그리드 평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토르 이놈! 내 아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그 내장으로 아비인 나를 묶어놓은 천하의 무뢰한아!
이제 이 로키의 철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거라!
늑대 펜리르도 뱀 요르문간드와 함께 비그리드 평원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침이 질질 흐르는
늑대 펜리른의 아가리는 위로 하늘, 아래로 땅에 닿아 있었고, 뱀 요르문간드는 온몸을 뒤채며 하늘과 땅에 독을 흩뿌려댔다.
세계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한 소리들로 가득 찼다. 태고 적부터 화염을 뿜어온 남쪽 불의
나라에서도 불의 거인들이 비그리드 평원으로 향하면서 하늘을 활활 태워버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 같은 이 거인들의 선두에는 태양처림 이글거리는 불칼을 든 불의 화신 수르트가 서 있었다.
거인들과 로키의 아들들, 지옥의 귀신들, 불으 거인들... 사방 600킬로미터에 달하는 비그리드 평원도 이 괴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거의 빈틈이 없어 보였다.
신들도 최후의 결전을 위해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었다. 먼저 아스가르드 경비대장 헤임달이 초
소에서 나와 모든 신을 향해 경적 나팔을 불었다. 그 소리가 아홉 세계 전역에 울려 퍼지자 신들
은 모두 일어나 오딘의 궁전에 모여 최후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애마 슬레입니르에 올라탄 오
딘은 미미르의 샘으로 가서 샘을 지키고 있는 현자 미미르에게 조언을 청해 들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어 온 우주나무 이그드라실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내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때마침 한 쌍의 남녀가 다가오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이그드라실
줄기 속 깊이 들어가 숨었다.
아사 신족과 발할라궁의 전사들 에인헤르야르는 무장을 갖추었다. 모두들 투구를 쓰고 쇠비늘
갑옷을 입고 칼과 창과 방패를 들었다. 발할라 궁전의 540개나 되는 문 앞에는 각각 800여명의
전사들이 도열했다. 오딘은 이들 40여만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거인족이 몰려오는 비그리드 평원으로 진군했다. 신 중의 신, 전쟁과 지혜의 신 오딘은 황금 투구와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난쟁이들로부터 받은 보검 궁니르를 휘두르며 대군의 선두에 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외눈
은 전방을 투시하며 적군의 진용을 살피고 있었다.
오딘이 늑대 펜리르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마침내 최후의 결전은 시작되었다. 오딘
바로 옆에 포진하고 있던 토르는 도끼 묠니르를 휘두르며 오딘을 엄호하려 했지만 우주 뱀 요르
문간드가 그에게 덤벼드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도 급급해 졌다.
한때는 거인족 여인인 게르드를 사랑했던 프레이르는 불의 거인 수르트와 맞섰다. 수르트가 이
글거리는 불칼을 휘드르며 달려들자 프레이르는 하인 스크르니르를 통해 사모하는 여인 게르드
에게 보냈던 보검이 못내 아쉬워졌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용맹한 신. 비록 역부족이긴 해도 장렬하게 저항하다가 수르트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난 다음에 쓰러져 갔다. 동토의 여신 게르드와 나누던 사랑의 추억이 죽어가는 그의 뇌리에 아름다운 영상처럼 스쳐지나갔다.
늑대 펜리르에게 한 손을 물려가며 이 괴물 늑대를 묶어두는 데 성공했던 외팔이 용사 티르는
거인국에서 온 괴물 개 가름과 맞붙었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은 서로으 숨통을 끊어놓는 것으로 치열한 승부를 마감했다.
동굴에 묶여 있다 나온 거인 로키는 두눈을 희번덕거리며 한때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제 불구
대천의 원수인 토르를 찾아헤맸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아스가르드의 경비대장 해임달이 버티고 서 있었다. 거인족이 토르의 도끼를 훔쳐갔을 때 토르를 여자로 분장시키려는 로키의 제안에
맞장구를 쳐주던 헤임달이었지만 생사가 걸린 육박전에서는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그들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지금과 같은 필사의 대결에서 무승부란 물론 어느 한쪽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였다.
토르는 우주 뱀 요르문간드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둘은 이전에는 바다에서 맞붙
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요르문간드는 토르의 낚시에 결려 거의 다 죽은 목숨이었으나 요행히 거인 히미르의 도움으로 빠져 나갔었다. 오늘 최후의 결전에서 다시 맞붙었으나 괴력의 용사 토
르에게 뱀 따위는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강의 거인 흐룽그니르를 한방에 해치운 힘과 솜씨로 토르는 요르문간드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요르문간드가 내뿜는 독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조심하지 않았던 것이 토르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죽어
넘어진 요르문간드로부터 불과 아홉 발짝을 떼자마자 피부 깊숙이 스며든 독 때문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영웅적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신들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은 자는 역시 최고신 오딘이었다. 이 세상 무
엇이든 먹어치울 것 같은 늑대 펜리르와 그가 벌이는 용호상박의 대결은 차마 눈뜨고 다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잔혹했다. 오딘은 궁니르를 휘두르며 늑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세상 끝에서
사슬에 묶인 채 오랜 세월 절치부심 이날만을 기다려 왔던 늑대 펜리르가 창에 몇 번 찔린다고
해서 간단히 쓰러질 리는 없었다. 오히려 놈의 신경을 콕콕 찌르는 상처는 놈을 더욱더 포악하게 만들었다.
구중궁궐에 앉아 온갖 마녀들을 탐하며 세상을 살아온 늙은 신 오딘이 이런 야수를 상대해 오
래 버티기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인들의 조상 이마르를 죽인 이래 모든 거인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던 최고신 오딘의 최후는 그렇게 찾아왔다.
신들의 왕 오딘은 죽고 신들의 수호자 토르도 죽었다. 신들과 인간의 희망인 발데르는 이미 죽
어 지옥에 갇혀 있다. 누가 남아 이 최후의 전투를 이끌 것인가? 신들과 에인헤르야르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갔다. 그러나 아직 긑나지는 않았다. 죽은 오딘에게는 또다른 용맹한 아들 비다르가 있었으니까.
비다르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토르가 로키에게 속아 허리띠도 풀고 도끼 묠니르도 놓아둔 채
거인국으로 떠났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토르는 숲 속에서 그리드라는 오딘의
정부 집에 하룻밤 묵었고, 그녀가 자시느이 무기를 토르에게 빌려주었기 때문에 토르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숲속의 여인 그리드와 오딘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비다르였다. 그 여인은 거인족이었으므로 비다르의 피에는 신과 거인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비다르는 아주 특별한 군화를 신고 다녔다. 그는 유사 이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 때마다 남아
서 버려진 가죽 찎Jrl들을 죄다 모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양의 가죽조각들을 압축하여 한 켤레의 신발로 만들었다. 그 신발이 바로 비다르의 특별한 군화이다. 따라서 이 가죽 군화는 질기기
로 말하면 쇠심줄보다 더하고 단단하기로 말하면 강철보다 더했다. 비다르는 이 무적의 군홧발을 아버지 원수 펜리르의 벌어진 아가리 속에가 쑥 집어넣었다. 천하의 펜리르라도 무쇠보다 단단한 군홧발이 뱃속으로 들어가 헤집어 놓으니 맥을 출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놈은 비다르의 발
을 두 토막 내겠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이를 악물었으나 어금니들만 유리병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비다르는 그렇게 늑대를 꼼작못하게 해놓고는 두 손으로 녀석의 위아랫니를 잡고는 아가리를
찢어버렸다. 신들의 왕을 잡아먹은 무서운 야수는 비그리드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고, 비다
르는 냉혹하고도 침착하게 녀석의 온 몸을 두 갈래로 찢어버렸다.
로키도 죽고 그의 사나운 두 아들 요르문간드와 펜리르도 죽었다. 이제 거인 진영에서 남은 것
은 불의 거인 수르트분. 그는 미쳐 날뛰며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온 세상을 향해 불칼을 던
져댔다. 아홉 세계는 모조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광로로 변해 버렸다. 아스가르드도 미드가르드도 활활 타오르고 요툰헤임도 화염에 휩싸였다. 심지어는 만년설의 나라 니플헤임도 열기로 인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들은 모두 죽었다. 발할라의 용사들도 모두 죽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죽었다.
거인들도, 남북에서 몰려온 괴물들도 모두 죽었다. 산천초목도 들짐승도 날짐승도 모두 죽었다. 하늘은 사라지고 니플헤임의 얼음과 서리와 빙하는 불길에 녹아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순식간에 불어난 바다는 모든 생명이 죽어간 대지를 서서히 뒤덮게 됐다.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로써 최후의 결전은 끝나고 우주는 그 생명의 한 차례 순환을 끝맺게 되었다.
파국은 대지와 천상의 세계를 모두 소멸시키고 오직 유유한 푸른 바다만을 남겼다. 이 바다는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그 속에서는 또다른 생명의 순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소리없이 진행될 것이다. 새 생명과 새 세계가 탄생하여 바다를 뚫고 떠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악다구니 같은 싸움질과 갈등으로 뒤덮였던 지난날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온 세상을 눈보라와 서리로
뒤덮던 겨울은 신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될 것이다.
새 세대의 신과 인간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할 신세계는 일년 365일 아름다운 녹색 풀로 뒤덮
인 상춘의 세계이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나무와 과일들이 저절로 자라는 축복의 대지가 그곳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갈 신인로는 무서운 거인은커녕 인강 사이에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외눈박이 신 오딘도, 두 눈 부릅뜨고 천둥을 내리치는 도끼 신 토르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지배자는 온화한 성품의 미남신 발데르이다. 그가 지옥에서 부활하여 지난 세상
에서 꽃피우지 못했던 지도력을 맘껏 발휘하며 생명의 새로운 순환을 앞장서서 이끌어갈 것이다.구세계의 중추를 이루었던 우주 나무 이그드라실은 새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세계의 축이
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의 원천을 제공한다. 악의 세력이 소멸한 신세계에서도 이 우주 나무가 종말의 예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 일이 닥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신세대 신과 인류의 비극적인 최후를 의식하지 않고 힘차게 발데르의 찬가를 부르면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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