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차별을 만들어 내었다. 왜냐하면 종교가
도덕이 되어야만 하였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한번 종교가
도덕이 되면 그것은 이미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종교는 가장 위대한 용기의 가능성이다. 종교는 무선택의
가장 위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선택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저것은 좋다 아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추하다 나는 이것은 사랑하지만 저것은
증오한다고 말한다.
마음은 분열하도록 유혹한다. 한번 그대가 분열하면 마음은
안심한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분열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대가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련다 하고 말한다면 마음은 마치
임종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a는 a일 뿐이지 a가 아닌 다른것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승찬은 거기에 반대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되는 것들은 이미 만나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만나고 있었다.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지 않다는 바로 이를 깨우치는 것이 가장 큰
근본 진리중의 하나이다. 그것들이 서로 반대된다고
말하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소로 반대하지 않는다. 존재적으로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들이 똑같은 에너지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개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오쇼의 신심명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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