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실재의 세계를 깨닫는 것. 거기에 눈뜨는 것. 그리하여 변화를 받는 것. 그리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보았다. 실재적으로 이런일을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지적 준비작업이
바로 변증법이다. 오랜 공부를 거쳐 어느날 현상세계에서 그것의 근원이 되는 실재의
세계로 옮겨지게 되는 데 이런 궁극실재 앞에서 인간의 생각이나 말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로지 역설만이 가능하게 된다고 했다. 불교에서 화두나 공안의 도움으로 일상적 앎의
한계를 자각한 결과 얻어지는 일종의 깨침을 통해 실상의 세계에 눈뜸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서양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원론
적으로 받아들였다.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와 유전변화하는 현상세계의 차이를
너무 부각한 나머지 그 조화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고 하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이 불교화엄사상과의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불교를 연상케 한다. 특히 언설의 차원을 넘어서 내면적 깨침을 궁극
목표로 삼았다는 데서 선불교의 한면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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