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폭포 혹은 수백미터 수직으로 하늘로 솟구쳐 나를 압도할
것만 같은 암벽앞에 예기치 않게 마주쳤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그져 입만 벌리고 서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순간 우리는
숭고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숭고미를 강제했던
폭포나 암벽을 두세번 반복해서 보았을 때 우리에게 찿아온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첫번째 보았을 때 느끼는 숭고의 감정을 계속
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이것이 바로 산업자본이 생산한
새로운 상품의 운명과 구조적으로 같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새로운 상품은 한번 보았을 때만 새로움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새로운 상품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칸트의 숭고미 역시 매번 엄청난
대상을 새롭게 만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발생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이해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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