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직면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허무라는 배경에
노출된다. 그러면 대체 내가 무엇때문에 살아왔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라는 의문이 일어난다.
거기애는 다른 어떤것으로도 메워지지 않는 갭이 생긴다.
그때 우리 자신의 근저에 있는 심연(深淵)이 열리게 된다.
그 심연에 직면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 내용이였던
모든 것들이 쓸모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심연은 실재로 항상 우리들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예컨데 우리는 몇십년 후에 죽음과 만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들이 살려는 한발 한발은 죽음을 향한 한걸음 한걸음
이며 끓임없이 한쪽 발을 죽음속에 담그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허무로 돌아가는 까닭모를 심연이 우리들 생 속에
잠재되어 있다. 우리의 존재는 비존재와 하나가 된 존재이며
끊임없이 없어지면서 끊임없이 존재를 다시 찿으려는 허무
위에서 진동하고 있다. 즉 생성전화(生成轉化)하는 존재이다.
그 허무는 우리 인생의 모든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자신 스스로가 우리에게 물음으로 바뀐다는 것
즉 우리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근저에 허무가 나타나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허무의 직면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의 심화이다. 일상의 우리 존재는 거기까지 도달해 있지
않다. 통상 우리는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목표로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 또는 내부의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자체가 지금 말한것과 같은
자각을 가로막고 있다. 즉 자기에게 허무가 나타나서
그와 함께 자기의 존재 자체를 의문으로 삼을 수 있는 지평이
열릴 수있는 길이 막혀있다.그러나 허무의 지평이 열렸을 때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밑바닥에 어떤 정지 일종의 멈춤이
나타난다. 의미를 가진 그런 삶의 밑바탕에 무의미가 나타난다.
그래서 토스토에프스키나 니체가 말하는 이른바 "모든것은 같다"라는
허무감이 불현듯 솟아 올라 끓임없이 앞을 향하고 있는
삶을 한발 뒤로 후퇴시켜 발 아래를 내려다 보게 된다.
니시타니 게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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