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5월 그는 류마치스를 고치기 위해서 바치골스크에가 있었다.
그곳에서 아주머니에게 보낸 것 중에 다음과 같이 쓴 것이 있다.
「.....저의 문학상의 창작 활동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 작품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어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마는.....저는 벌써부터 착수한 이 작품을 세 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그리고 저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고쳐 써볼까
합니다. .....저는 어떤 허영심을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의 감화를 받아쓰고 있습니다. 창작하는 가운데 저는 만족함을
느낍니다. .....저는 맹목적으로 즐기고 기뻐하는 것과 모든 것을 실증의
대상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났습니다. 사회가 제게 줄
것이라고 믿어지는 그것보다도 훨씬 숭고하고도 향기로운 만족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양심의 자각, 지금까지 체험해 본 그것보다도
더 높은 자기평가(自己評價)의 자각, 착하고 어질며 훌륭한 감정이 세차게
맥을 뛰게 하는 자각입니다. .....」
이 편지의 내용으로 그가 자기와 자기의 일에 대하여 충실한 자각을
얻은 것을 알 수가 있다. 6월 29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양심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진실한 길잡이이다. 그러나 그 양심의
부르짖음이 다른 것들과 달리하고 있는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허영의
소리도 다 같이 세차게 들려올 것이다. 예를 들면 씻을 수 없는 버림을
당하는 것도 좋은 일례가 될 것이다.
그 목적이 자기의 행복에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타인의 공론을
싫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타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신(神)을 그의
목적으로 삼는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정의는 만인이 의무로 삼을 착한 행동이 극도에 달한 한도를 말함이다.
그 이상이 되면 완전 무결에의 경사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이하로
떨어질 때엔 죄악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때 사상적으로 놀랄 만큼 성숙해졌다. 그해 7월 그의
처녀작 [유년시대]가 완성되었다. 그는 [유년시대]를 탈고한 수일 후에
그 원고를 현대인의 편집자인 네크라소프에게 보냈다.
1852년 8월 5일 그는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그는 8월 25일 군대에서
현대인사로부터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당신이 쓴 [유년시대]를 읽어보았습니다. 매우 좋은 작품으로
판단되어 잡지에 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속고(續稿)를 보지 않은 까닭에
확실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이 작자에겐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봅니다. 이 작자의 경향(傾向), 이를테면 티없는 내용과 진실성이 풍부한
점에 있어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속편(續編)에서 더욱더
빛을 내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 작품은 나무랄 데가 없는 소설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작품과 천재적인 소질에 저는 깊이 감격한 바 있으니
제 앞으로 속편의 원고를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문단(文壇)의 일시적인 방문객이 아니라면 머리 글자만을 딴 익명을
쓴다는 것은 삼가하시고 본래의 성명을 사실대로 발표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이에 권하는 바입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한 달 후 네크라소프로부터 또다시 편지를 받았다.
「.....읽기 어렵게 쓴 원고가 아니므로, 교정삼아 인쇄한 것을 다시
정밀하게 읽어본 결과 당신의 작품이 내가 처음에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이란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글을 쓴 당신에게 확실히
작가의 소질이 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이 원고로 인해 당신은 문학계에
첫걸음을 내어디딘만큼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편지를 받고 원고료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냈다. 이에
네크라소프로부터 세 번째의 편지를 받았다.
「.....우리 나라의 일류 잡지사에선 처음 추천을 받은 신인작가의
처녀작품에 대해선 고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을 거쳐
문단에 나오게 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당신의 원고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이 받고 있는 최고의 고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에 한때 주저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을
일반 독자의 판단에 의한 여론을 묻기도 전에 당신에게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처녀작에 대한 제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기도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 따라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와로체와 파나예프는 그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독자들로부터 이 신인작가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본명을 알고자 문의가 빗발쳤다.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새로 등장한 작가에 대해서 냉정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네크라소프만이 톨스토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투르게네프조차도 톨스토이를 혹평하였다.」
투르게네프는 그로부터 얼마 후 네크라소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톨스토이를 작가로 인정하였다.
「.....자네가 한 일엔 틀림이 없네. 그 작가는 유망한 재능을 갖고
있네. .....작가에게 편지를 내어 부지런히 글을 쓰도록 지도와 격려를 해
주게.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하여 그가 흥미를 느낀다면 나도 그를
환영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내겠다고 전해주기를 바라네.」
톨스토이는 10월 28일 아주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광천(鑛泉)에서 돌아온 다음 저는 장관에게 받은 검열로 말미암아 매우
불쾌한 마음으로 한 달을 지냈습니다. 행진과 대포 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하게 된
까닭에 저의 올바른 생활의 규칙이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다행히 그
일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사냥, 소설 창작,
독서, 니코레니카와 만나는 것 등으로 정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또 다른 편지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저는 지금도 몸은 건강하지만 추위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내년 여름에도 광천에서 지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광천에서 많은 도움을 얻은 건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돈이 없을 때엔 기분이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엔 더욱더 창작에 몰두합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우편으로 보냈던 작품은, 9월호의 현대인에 [유년시대]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저는 L.N"이라고 제 이름의 머리 글자만의 익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코레니카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그 작가가
누구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알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호평이 자자해진 톨스토이의 [유년시대]는 이 작품으로 그의 또다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자기가
어린 시절에 겪은 사실을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유년시대]는 깊은
의미에서 분석해볼 때 내면적인 점에 있어선 자기 자신을 쓰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일 출신의 작가 도마스 만 씨는 예일 대학에서 발간하는 계간지에서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이란 평론 중에서 [유년시대]에 대하여 날카로운
평을 하였다.
톨스토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주위 사람들을 적당히 그려낸 사실에
가까운 소설이다라며 등장된 인물 중에서 가장 미숙한 인상을 주는 것은
주인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감각이 지극히 예민하였던 톨스토이 이지만, 진실한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였으므로, [유년시대]에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묘사되어
있을 뿐더러 주인공의 어린 시절 심리의 변화나 공상 등이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실제 이 작품은 작가의 묘사력, 상상력, 관찰력, 감정의
움직임 등이 뛰어나며 한 집안의 일이 생생하게 그리고 진실성 있게
그려져 있다.
「나의 생각으로선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이란 것은 소리없이 웃는 표정
속에 싸여 있는 것이다. 만일 그 웃음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더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얼굴은 평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에 뜻이
있다면 그것은 보기 싫은 얼굴이다.」
「아버지가 몹시 화가 나서 화를 내면 낼수록 그 손가락은 점점 더 빨리
움직이고 그와 반대인 경우에는 손가락의 운동이 느리게 된다. 아버지가
입을 다물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
그는 또한 스타로그라도프스카야 마을에 살고 있을 때 [러시아의 지주
이야기]라는 장편 소설을 써보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장편은
계획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비록 계획에 그쳤지만 이것은 그의 후기 작품
속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때 문인으로서의 자기의 장래가 밝아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장교로 승진하게 되면 군대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기다려도 장교로 승진되지 않았고 장교로 승진하기 위한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장교가 될 날은 더욱 멀어졌다. 그의 자존심은 장교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군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장교가 되기 위해 근무 기한이 연장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그해 12월 24일 [침입]이란 단편 소설을 현대 인사로 보냈다.
이것은 그가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경험을 아름다운 자연과 인물을 묘사하여
엮은 것이다. 그는 전투에서 생명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나 장교로
승진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릴 수 없어 퇴직을 하려했다. 그러나 퇴직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가지 일에 그는 상당히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문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바치골프스크에서 [소년시대]를 쓰고 나서 [게임 부르는 자의
수기]를 탈고하였다. 그 자신은 별로 흡족하지 않았으나 현대인사로
발송하였다.
1854년 1월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들러 다뉴브군에 파견되어
뿌카레스트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군(軍)을 지휘하고 있는
공작으로부터 가족처럼 친절한 환영을 받았으나 곧바로 오리테니와의 보병
중대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 달 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솔직한 감상을 적었다.
「.....오리테니와에서 지낸 2주일과 그 외의 곳을 정찰하고 돌아다닌
1주일을 빼놓고 줄곧 뿌카레스트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태만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난잡한 생활이 저로선 매우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처음 이곳에 머문 것은 근무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열병으로 거의 3주일이나 누워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앞으로
2,3일이 지나면 쉬뤼스트리야 근방의 진지에 있는 사령관의 부대로 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는 쉬뤼스트리야에서 전쟁의 또 다른 면을 체험하였다. 코카시아에서
체험한 전쟁과는 규모에 있어 매우 달랐다. 그러나 그후
세봐스토폴리에서는 더욱 무서운 전쟁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는 이곳에서의 체험도 작가로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때 그는
형 니콜라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다음 날의 일을 보통이라는 듯이 생각하는 표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속에선 내일 공격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커다란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형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어떤 큰 일을 앞에 놓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때입니다. 그것은
괴로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무서움과 괴로움이란
가장 볼안한 감정의 하나 입니다.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아 올 때쯤 되어
그 큰 일을 실천으로 옮길 순간이 가까와짐에 따라 차츰 무섭고도 괴로운
감정은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이 공중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만일 3시쯤 되어 공격하는 일이
중지되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원통하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든든해진 것을 느꼈습니다. .....」
그는 그후 크리미아군으로 전임(轉任)할 것을 자원하여 7월 20일에
크리미아로 출발하였다. 그는 좀더 치열한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더욱
깊은 체험을 쌓아보려 하였다.
그는 크리미아로 가는 도중 병으로 입원하여 세바스토폴리에 도착했을
때엔 1854년 11월 7일 이었다.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리에서 얻은
경험으로 [세바스토폴리]를 썼다. 이 작품은 다음해 6월 현대인사의
네크라소프 앞으로 보내졌다.
톨스토이는 그 원고와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이 원고의 복잡한 철자법과 작가의 주관을 나타낸 표현을
검고국(檢稿局)에서 삭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알고 계시니까 저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글과 같은
군사(軍事)에 관한 소설은 우리 나라에선 불행하게도 매우 드물거나 혹은
활자로 나타난 것은 거의 없습니다. .....」
그후 러시아 황제는 현대인사의 네크라소프로부터 이 소설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듣고 원고를 검토한 다음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또한 톨스토이와 같은 훌륭한 작가를 최전선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므로
안전지대로 이동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때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은 평론을 썼다.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리]는 사람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창작해 내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탄을
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이 작품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실제 투르게네프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섞이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그때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썼다.
「3월 5일 신(神)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숭고한 사상으로 인도하였다.
나는 그의 실현에 자기의 일생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상은
인류의 발달에 새로운 종교의 디딤돌인 것이다. 그러나 믿는 마음과
영묘하고 이상스러운 비밀에서 벗어난 종교는 실제적인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에 지상의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 새로운 종교의
밑바탕이다. 이 사상(思想)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이 목적을 향하여
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된다면 광열(狂熱)이나
영지(靈智)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것이다. 종교를 본바탕으로 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결합을 위해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 즉 거기에 나를
이끌어주는 새로운 사상의 근본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상으로
이끌릴 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세계 문인들은 물론 수억에 달하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으며 앞서 발표된 어느 것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5년 1월 6일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군인 잡지의 창간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저는 군인 잡지를 창간(創刊)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특정인들과 힘을 합하여 세운 이 계획은 공작(公爵)이 인정하여
폐하의 허가를 받고자 사람을 보냈으나 도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황제께서는 허가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장래
계획을 송두리째 변경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크리미아 전쟁이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면 그리고 제가 만족할만한 지위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군대를 떠나 페테르스부르크의 육군 대학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계속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또한 제가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위(少尉)보다 더 나은 계급이 필요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주머니와 저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니코레니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투르게네프는 마센카 누이동생과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
얼마 후 톨스토이는 [코카시아의 이야기] 속에서 [산림도벌]이란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투르게네프는 이 짧은 소설에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네크라소프는 놀랄 만큼 올바른 관찰력으로 씌어진 싱싱하고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스탕달은 톨스토이의 전쟁 문학에 대하여 한 사람의 위대한 스승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톨스토이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탕달의 경우엔 [파르므의 승원(僧院)]과 [적(赤]과 흑(黑)의
작가로서밖에 평할 수 없지만 그 두 작품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며
모방하기 어려운 예술품입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스탕달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습니다. 그는 내게 전쟁을 이해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파르므의 승원]속에 나오는 와텔로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훌륭한 묘사가 담겨 있습니다. .....」
톨스토이는 스탕달을 진심으로 숭배하였으며 동시에 전쟁 문학에 관한
연구도 철저히 하였다. 그 자신이 그 만큼 많은 경험을 한 것도 그 일이
그에게 작가로서 글을 쓰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찰가이며 상상가이고 감정가인 동시에 본능가(本能家)이고
정신가(精神家)였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언제나 새로운
표현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의 무궁무진한 창작의 역량과
그것을 살리는 끈기와 승부욕 등은 그를 작가로서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아주머니에게 보낸 것 중에 다음과 같이 쓴 것이 있다.
「.....저의 문학상의 창작 활동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 작품을 출판하여 세상에 내어보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마는.....저는 벌써부터 착수한 이 작품을 세 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그리고 저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고쳐 써볼까
합니다. .....저는 어떤 허영심을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의 감화를 받아쓰고 있습니다. 창작하는 가운데 저는 만족함을
느낍니다. .....저는 맹목적으로 즐기고 기뻐하는 것과 모든 것을 실증의
대상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났습니다. 사회가 제게 줄
것이라고 믿어지는 그것보다도 훨씬 숭고하고도 향기로운 만족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양심의 자각, 지금까지 체험해 본 그것보다도
더 높은 자기평가(自己評價)의 자각, 착하고 어질며 훌륭한 감정이 세차게
맥을 뛰게 하는 자각입니다. .....」
이 편지의 내용으로 그가 자기와 자기의 일에 대하여 충실한 자각을
얻은 것을 알 수가 있다. 6월 29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양심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진실한 길잡이이다. 그러나 그 양심의
부르짖음이 다른 것들과 달리하고 있는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허영의
소리도 다 같이 세차게 들려올 것이다. 예를 들면 씻을 수 없는 버림을
당하는 것도 좋은 일례가 될 것이다.
그 목적이 자기의 행복에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타인의 공론을
싫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타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신(神)을 그의
목적으로 삼는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정의는 만인이 의무로 삼을 착한 행동이 극도에 달한 한도를 말함이다.
그 이상이 되면 완전 무결에의 경사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이하로
떨어질 때엔 죄악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때 사상적으로 놀랄 만큼 성숙해졌다. 그해 7월 그의
처녀작 [유년시대]가 완성되었다. 그는 [유년시대]를 탈고한 수일 후에
그 원고를 현대인의 편집자인 네크라소프에게 보냈다.
1852년 8월 5일 그는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그는 8월 25일 군대에서
현대인사로부터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당신이 쓴 [유년시대]를 읽어보았습니다. 매우 좋은 작품으로
판단되어 잡지에 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속고(續稿)를 보지 않은 까닭에
확실한 것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이 작자에겐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봅니다. 이 작자의 경향(傾向), 이를테면 티없는 내용과 진실성이 풍부한
점에 있어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속편(續編)에서 더욱더
빛을 내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 작품은 나무랄 데가 없는 소설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작품과 천재적인 소질에 저는 깊이 감격한 바 있으니
제 앞으로 속편의 원고를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문단(文壇)의 일시적인 방문객이 아니라면 머리 글자만을 딴 익명을
쓴다는 것은 삼가하시고 본래의 성명을 사실대로 발표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이에 권하는 바입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한 달 후 네크라소프로부터 또다시 편지를 받았다.
「.....읽기 어렵게 쓴 원고가 아니므로, 교정삼아 인쇄한 것을 다시
정밀하게 읽어본 결과 당신의 작품이 내가 처음에 생각하였던 것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이란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글을 쓴 당신에게 확실히
작가의 소질이 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이 원고로 인해 당신은 문학계에
첫걸음을 내어디딘만큼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편지를 받고 원고료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냈다. 이에
네크라소프로부터 세 번째의 편지를 받았다.
「.....우리 나라의 일류 잡지사에선 처음 추천을 받은 신인작가의
처녀작품에 대해선 고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을 거쳐
문단에 나오게 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당신의 원고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이 받고 있는 최고의 고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에 한때 주저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을
일반 독자의 판단에 의한 여론을 묻기도 전에 당신에게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처녀작에 대한 제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기도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 따라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와로체와 파나예프는 그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독자들로부터 이 신인작가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본명을 알고자 문의가 빗발쳤다.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새로 등장한 작가에 대해서 냉정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네크라소프만이 톨스토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투르게네프조차도 톨스토이를 혹평하였다.」
투르게네프는 그로부터 얼마 후 네크라소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톨스토이를 작가로 인정하였다.
「.....자네가 한 일엔 틀림이 없네. 그 작가는 유망한 재능을 갖고
있네. .....작가에게 편지를 내어 부지런히 글을 쓰도록 지도와 격려를 해
주게.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하여 그가 흥미를 느낀다면 나도 그를
환영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내겠다고 전해주기를 바라네.」
톨스토이는 10월 28일 아주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광천(鑛泉)에서 돌아온 다음 저는 장관에게 받은 검열로 말미암아 매우
불쾌한 마음으로 한 달을 지냈습니다. 행진과 대포 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하게 된
까닭에 저의 올바른 생활의 규칙이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다행히 그
일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사냥, 소설 창작,
독서, 니코레니카와 만나는 것 등으로 정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또 다른 편지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저는 지금도 몸은 건강하지만 추위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내년 여름에도 광천에서 지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광천에서 많은 도움을 얻은 건 사실입니다.
.....언제든지 돈이 없을 때엔 기분이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엔 더욱더 창작에 몰두합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우편으로 보냈던 작품은, 9월호의 현대인에 [유년시대]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저는 L.N"이라고 제 이름의 머리 글자만의 익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니코레니카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그 작가가
누구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알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호평이 자자해진 톨스토이의 [유년시대]는 이 작품으로 그의 또다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자기가
어린 시절에 겪은 사실을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유년시대]는 깊은
의미에서 분석해볼 때 내면적인 점에 있어선 자기 자신을 쓰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일 출신의 작가 도마스 만 씨는 예일 대학에서 발간하는 계간지에서
[톨스토이의 초기 작품]이란 평론 중에서 [유년시대]에 대하여 날카로운
평을 하였다.
톨스토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주위 사람들을 적당히 그려낸 사실에
가까운 소설이다라며 등장된 인물 중에서 가장 미숙한 인상을 주는 것은
주인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감각이 지극히 예민하였던 톨스토이 이지만, 진실한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였으므로, [유년시대]에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묘사되어
있을 뿐더러 주인공의 어린 시절 심리의 변화나 공상 등이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실제 이 작품은 작가의 묘사력, 상상력, 관찰력, 감정의
움직임 등이 뛰어나며 한 집안의 일이 생생하게 그리고 진실성 있게
그려져 있다.
「나의 생각으로선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이란 것은 소리없이 웃는 표정
속에 싸여 있는 것이다. 만일 그 웃음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더할 수만
있다면 그 얼굴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이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얼굴은 평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에 뜻이
있다면 그것은 보기 싫은 얼굴이다.」
「아버지가 몹시 화가 나서 화를 내면 낼수록 그 손가락은 점점 더 빨리
움직이고 그와 반대인 경우에는 손가락의 운동이 느리게 된다. 아버지가
입을 다물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
그는 또한 스타로그라도프스카야 마을에 살고 있을 때 [러시아의 지주
이야기]라는 장편 소설을 써보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장편은
계획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비록 계획에 그쳤지만 이것은 그의 후기 작품
속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때 문인으로서의 자기의 장래가 밝아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장교로 승진하게 되면 군대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기다려도 장교로 승진되지 않았고 장교로 승진하기 위한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장교가 될 날은 더욱 멀어졌다. 그의 자존심은 장교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군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장교가 되기 위해 근무 기한이 연장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그해 12월 24일 [침입]이란 단편 소설을 현대 인사로 보냈다.
이것은 그가 실제 전투에 참가한 경험을 아름다운 자연과 인물을 묘사하여
엮은 것이다. 그는 전투에서 생명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나 장교로
승진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릴 수 없어 퇴직을 하려했다. 그러나 퇴직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가지 일에 그는 상당히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문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바치골프스크에서 [소년시대]를 쓰고 나서 [게임 부르는 자의
수기]를 탈고하였다. 그 자신은 별로 흡족하지 않았으나 현대인사로
발송하였다.
1854년 1월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들러 다뉴브군에 파견되어
뿌카레스트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군(軍)을 지휘하고 있는
공작으로부터 가족처럼 친절한 환영을 받았으나 곧바로 오리테니와의 보병
중대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 달 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솔직한 감상을 적었다.
「.....오리테니와에서 지낸 2주일과 그 외의 곳을 정찰하고 돌아다닌
1주일을 빼놓고 줄곧 뿌카레스트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태만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난잡한 생활이 저로선 매우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처음 이곳에 머문 것은 근무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열병으로 거의 3주일이나 누워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앞으로
2,3일이 지나면 쉬뤼스트리야 근방의 진지에 있는 사령관의 부대로 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는 쉬뤼스트리야에서 전쟁의 또 다른 면을 체험하였다. 코카시아에서
체험한 전쟁과는 규모에 있어 매우 달랐다. 그러나 그후
세봐스토폴리에서는 더욱 무서운 전쟁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는 이곳에서의 체험도 작가로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때 그는
형 니콜라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다음 날의 일을 보통이라는 듯이 생각하는 표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속에선 내일 공격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커다란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형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어떤 큰 일을 앞에 놓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때입니다. 그것은
괴로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무서움과 괴로움이란
가장 볼안한 감정의 하나 입니다.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아 올 때쯤 되어
그 큰 일을 실천으로 옮길 순간이 가까와짐에 따라 차츰 무섭고도 괴로운
감정은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이 공중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만일 3시쯤 되어 공격하는 일이
중지되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원통하게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든든해진 것을 느꼈습니다. .....」
그는 그후 크리미아군으로 전임(轉任)할 것을 자원하여 7월 20일에
크리미아로 출발하였다. 그는 좀더 치열한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더욱
깊은 체험을 쌓아보려 하였다.
그는 크리미아로 가는 도중 병으로 입원하여 세바스토폴리에 도착했을
때엔 1854년 11월 7일 이었다.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리에서 얻은
경험으로 [세바스토폴리]를 썼다. 이 작품은 다음해 6월 현대인사의
네크라소프 앞으로 보내졌다.
톨스토이는 그 원고와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이 원고의 복잡한 철자법과 작가의 주관을 나타낸 표현을
검고국(檢稿局)에서 삭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알고 계시니까 저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글과 같은
군사(軍事)에 관한 소설은 우리 나라에선 불행하게도 매우 드물거나 혹은
활자로 나타난 것은 거의 없습니다. .....」
그후 러시아 황제는 현대인사의 네크라소프로부터 이 소설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를 듣고 원고를 검토한 다음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또한 톨스토이와 같은 훌륭한 작가를 최전선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므로
안전지대로 이동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때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은 평론을 썼다.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리]는 사람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창작해 내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탄을
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이 작품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
실제 투르게네프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섞이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그때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썼다.
「3월 5일 신(神)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숭고한 사상으로 인도하였다.
나는 그의 실현에 자기의 일생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상은
인류의 발달에 새로운 종교의 디딤돌인 것이다. 그러나 믿는 마음과
영묘하고 이상스러운 비밀에서 벗어난 종교는 실제적인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에 지상의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 새로운 종교의
밑바탕이다. 이 사상(思想)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이 목적을 향하여
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된다면 광열(狂熱)이나
영지(靈智)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것이다. 종교를 본바탕으로 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결합을 위해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 즉 거기에 나를
이끌어주는 새로운 사상의 근본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상으로
이끌릴 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세계 문인들은 물론 수억에 달하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으며 앞서 발표된 어느 것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5년 1월 6일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군인 잡지의 창간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저는 군인 잡지를 창간(創刊)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특정인들과 힘을 합하여 세운 이 계획은 공작(公爵)이 인정하여
폐하의 허가를 받고자 사람을 보냈으나 도중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황제께서는 허가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장래
계획을 송두리째 변경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크리미아 전쟁이 좋은
결과를 맺게 된다면 그리고 제가 만족할만한 지위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군대를 떠나 페테르스부르크의 육군 대학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계속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또한 제가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위(少尉)보다 더 나은 계급이 필요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주머니와 저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니코레니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투르게네프는 마센카 누이동생과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
얼마 후 톨스토이는 [코카시아의 이야기] 속에서 [산림도벌]이란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투르게네프는 이 짧은 소설에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네크라소프는 놀랄 만큼 올바른 관찰력으로 씌어진 싱싱하고 깊은
흥미를 자아내는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스탕달은 톨스토이의 전쟁 문학에 대하여 한 사람의 위대한 스승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톨스토이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스탕달의 경우엔 [파르므의 승원(僧院)]과 [적(赤]과 흑(黑)의
작가로서밖에 평할 수 없지만 그 두 작품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며
모방하기 어려운 예술품입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스탕달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습니다. 그는 내게 전쟁을 이해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파르므의 승원]속에 나오는 와텔로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훌륭한 묘사가 담겨 있습니다. .....」
톨스토이는 스탕달을 진심으로 숭배하였으며 동시에 전쟁 문학에 관한
연구도 철저히 하였다. 그 자신이 그 만큼 많은 경험을 한 것도 그 일이
그에게 작가로서 글을 쓰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찰가이며 상상가이고 감정가인 동시에 본능가(本能家)이고
정신가(精神家)였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언제나 새로운
표현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의 무궁무진한 창작의 역량과
그것을 살리는 끈기와 승부욕 등은 그를 작가로서 완전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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