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857년 1월 29일 모스크바를 떠나 왈소를 거쳐 파리에서
투르게네프를 만나게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이 젊고 두려운 벗을 기쁜 표정으로 환영하였다.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의 생활에 새로운 정성을
다하려고 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그와 같은 태도를 사회의
모든 경험을 쌓아온 투르게네프는 쉽게 알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투르게네프는 친구에게 보낸
글에서 톨스토이에 대해 약간 언급했다.
「.....톨스토이를 이곳에서 자주 만나게 됩니다. .....톨스토이와는
어쩐지 철저하게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보는 것이 서로
달라 생각하는 것도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
그러나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자기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저는 파리에서 45일간을 보냈습니다. 이 여행은 너무 유쾌하여 외국
여행에 대하여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사교계와
문단방면(文壇方面)은 물론이려니와 카페나 공개된 무도회에도 잘 나가자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제게 있어서 새롭고 흥미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하루가 굉장히 짧게 느껴집니다.
.....투르게네프는 육체적인 것보다 더 괴로운 정신적인 면에 있어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
그는 파리에서 투르게네프를 만남으로써 그에 대한 보다 확실한 사랑을
발견하였지만 파리는 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사형을
집행하는 단두대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57년 4월 6일 6시부터 7시까지의 사이에 일어난 사형집행의
광경을 구경하러 갔었다. 순수하게 보이는 하얀 피부의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서(聖書)에 입을 맞추고 나면 그는 곧바로 형틀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다. 어쩌면 생명이 이렇게 허무한 것일까?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도덕과 예술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사랑과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두대가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후 [참희록]에서 사형집행의 장면을 다시 회고하였다.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에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는 기억이, 진화에 대하여 지금까지 믿어 왔던 중심 잃은 마음이
흔들림을 나에게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었다. 목과 몸이 끊어져 따로
떨어진 두 동강의 주검이 한꺼번에 무딘 소리를 내면서 상자 속에 떨어진
것을 봤을 때 나는 머리 속에서 뿐만이 아니고 그 분위기를 호흡한
것으로서 모든 것을 깨달았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진화의 신령스러운
지혜가 마련한 어떤 이론으로서도 그 행위를 변호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설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창세기로부터 어떤 이론에 의하여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따라서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말과 행실이 아니고
진보의 법칙도 아니며 오직 쉬지 않고 뛰는 맥이 줄기차게 활동하고
염통을 가진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단두대의 모습을 보고난 다음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며칠 밤을
새웠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스위스의 쥬네에브로 떠났다.
쥬네에브는 아름다왔으며 기후도 좋았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다운 즐거움을 느꼈으며 쇠약했던 원기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그곳의 생활을 그는 아주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제가 현재 머물고 있는 쥬네에브 호반(湖畔)의 크라란은 루소가
한때 수양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자연의 품안에 싸여있는 모든
만물이 따뜻한 봄빛과 더불어 지상의 친국을 이루고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눈에 띄이는 것들이 모두 황홀합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저곳을 거닐기도 하고 방의 들창 옆에 멀거니 서 있기도
하면서 눈부신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많습니다.....
. 파리를 떠나 이곳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곳엔
러시아 사람들의 집단 부락도 있습니다. 푸우시칭, 카라마징,
미시첼스키이라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저를 무척 좋아하고
아껴줍니다. .....」
톨스토이는 여행 중에 다음과 같이 일기를 적기도 했다.
「두 달 동안 크라란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그 동안 한결같이 아침부터
황혼이 짙어갈 무렵까지, 그리고 희미한 등불의 그림자가 산들산들 미풍이
나붓거릴 때, 들창문을 활짝 열어 제쳐놓고 거울같이 고요한 호수 위에 먼
산의 그림자가 깃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때마다 물끄러미
앉아 있는 나의 눈망울은, 드디어 아름다운 운치에 도취되어 순식간에
나의 마음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이 그리워지고
내 자신을 아껴야만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이
아쉬워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깊어지고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즐겁게 여겨져 오래도록 살고 싶고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는 것이 몹시도
싫어졌다. 어린이 마냥 시적인 공포심마저 들기도 하였다. .....정원에
외로이 앉아 언덕과 호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 밀려오는 공포심이 내
육체에까지 미치는 듯한 인상을 느꼈다. .....」
그는 그곳에서 사샤라고 부르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과 벗하여
산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그후 7월 룻세룬으로 가서 그곳에서 느낀 감상을 단편소설 [룻세룬]으로
창작하였다. [룻세룬]은 현대인의 9월호에 실렸으나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쯤 지나 독자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 소설의 주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투르게네프를 만나게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이 젊고 두려운 벗을 기쁜 표정으로 환영하였다.
톨스토이는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의 생활에 새로운 정성을
다하려고 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톨스토이의 그와 같은 태도를 사회의
모든 경험을 쌓아온 투르게네프는 쉽게 알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투르게네프는 친구에게 보낸
글에서 톨스토이에 대해 약간 언급했다.
「.....톨스토이를 이곳에서 자주 만나게 됩니다. .....톨스토이와는
어쩐지 철저하게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보는 것이 서로
달라 생각하는 것도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
그러나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자기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저는 파리에서 45일간을 보냈습니다. 이 여행은 너무 유쾌하여 외국
여행에 대하여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사교계와
문단방면(文壇方面)은 물론이려니와 카페나 공개된 무도회에도 잘 나가자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제게 있어서 새롭고 흥미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하루가 굉장히 짧게 느껴집니다.
.....투르게네프는 육체적인 것보다 더 괴로운 정신적인 면에 있어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
그는 파리에서 투르게네프를 만남으로써 그에 대한 보다 확실한 사랑을
발견하였지만 파리는 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사형을
집행하는 단두대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57년 4월 6일 6시부터 7시까지의 사이에 일어난 사형집행의
광경을 구경하러 갔었다. 순수하게 보이는 하얀 피부의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서(聖書)에 입을 맞추고 나면 그는 곧바로 형틀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다. 어쩌면 생명이 이렇게 허무한 것일까?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도덕과 예술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사랑과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두대가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면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후 [참희록]에서 사형집행의 장면을 다시 회고하였다.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에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는 기억이, 진화에 대하여 지금까지 믿어 왔던 중심 잃은 마음이
흔들림을 나에게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었다. 목과 몸이 끊어져 따로
떨어진 두 동강의 주검이 한꺼번에 무딘 소리를 내면서 상자 속에 떨어진
것을 봤을 때 나는 머리 속에서 뿐만이 아니고 그 분위기를 호흡한
것으로서 모든 것을 깨달았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진화의 신령스러운
지혜가 마련한 어떤 이론으로서도 그 행위를 변호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설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창세기로부터 어떤 이론에 의하여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따라서 선악을 구별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말과 행실이 아니고
진보의 법칙도 아니며 오직 쉬지 않고 뛰는 맥이 줄기차게 활동하고
염통을 가진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단두대의 모습을 보고난 다음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며칠 밤을
새웠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스위스의 쥬네에브로 떠났다.
쥬네에브는 아름다왔으며 기후도 좋았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다운 즐거움을 느꼈으며 쇠약했던 원기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그곳의 생활을 그는 아주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제가 현재 머물고 있는 쥬네에브 호반(湖畔)의 크라란은 루소가
한때 수양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자연의 품안에 싸여있는 모든
만물이 따뜻한 봄빛과 더불어 지상의 친국을 이루고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눈에 띄이는 것들이 모두 황홀합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저곳을 거닐기도 하고 방의 들창 옆에 멀거니 서 있기도
하면서 눈부신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많습니다.....
. 파리를 떠나 이곳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곳엔
러시아 사람들의 집단 부락도 있습니다. 푸우시칭, 카라마징,
미시첼스키이라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저를 무척 좋아하고
아껴줍니다. .....」
톨스토이는 여행 중에 다음과 같이 일기를 적기도 했다.
「두 달 동안 크라란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그 동안 한결같이 아침부터
황혼이 짙어갈 무렵까지, 그리고 희미한 등불의 그림자가 산들산들 미풍이
나붓거릴 때, 들창문을 활짝 열어 제쳐놓고 거울같이 고요한 호수 위에 먼
산의 그림자가 깃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때마다 물끄러미
앉아 있는 나의 눈망울은, 드디어 아름다운 운치에 도취되어 순식간에
나의 마음과 함께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이 그리워지고
내 자신을 아껴야만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이
아쉬워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깊어지고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즐겁게 여겨져 오래도록 살고 싶고 죽음이란 것을 생각하는 것이 몹시도
싫어졌다. 어린이 마냥 시적인 공포심마저 들기도 하였다. .....정원에
외로이 앉아 언덕과 호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 밀려오는 공포심이 내
육체에까지 미치는 듯한 인상을 느꼈다. .....」
그는 그곳에서 사샤라고 부르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과 벗하여
산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그후 7월 룻세룬으로 가서 그곳에서 느낀 감상을 단편소설 [룻세룬]으로
창작하였다. [룻세룬]은 현대인의 9월호에 실렸으나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쯤 지나 독자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 소설의 주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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