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과 여흥거리가 이렇게 많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고, 이를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 대부분은 즐길 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책, 소설, 혹은 잡지를 잡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거나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댈 겁니다.
즐기고, 놀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라는 요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합니다. 동료가 없는 상태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종류건 오락거리가 없는 상태를
두려워합니다. 혼자서 벌판이나 숲으로 산보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말도 하지 않고,
노래도 하지 않고, 오직 조용히 걸으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짓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에
싫증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우거나, 가르치거나, 집안일 을 하거나, 직업에 매달리는
등의 무미 건조한 일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적 여유가 있어도 가볍게든
심각하게든 즐기려고만 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종교 쪽으로 돌아서곤
합니다. 종교 쪽으로 돌아선다는 건 책을 읽거나 영화관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종교도 오락, 무료함, 무미 건조한 일상으로부터의 일종의 진지한 탈출 수단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현상들을 주의해서 보았는지 궁금하군요. 대개의 사람들은 늘 어떤 일에
열중합니다. 푸자, 특정 언어의 반복, 이러저러한 걱정거리에 매달립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오락에도 붙잡히지 말고 혼자 있으려고 해 보세요.
그러면 곧 여러분 자신에게서 떠나고 싶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어버리고 싶어지는 데
놀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전문 오락 구조와 자동화한 놀이가,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만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온
세계의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오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고,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 가고,
속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오락 수단, 출판되는 방대한 양의
서적, 스포츠 기사로 메워진 신문 -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비어 있고, 미련하고, 범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 및
사교적인 새 관습을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고독을 느끼고 있는지, 주의해서 본 적이 있는지요? 고독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절에 가고,
교회에 가고, 사원에 갑니다. 고독이 두려워 우리는 옷을 차려 입고 사교 행사에 나가고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습니다.
고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중 일부는 이 말에 길들여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느낌만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산책하려 하고 혹은 책도 없이 이야기
상대도 없이 지내보려 하지만 곧 싫증을 내고 맙니다. 여러분은 이런 느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왜' 싫증을 느끼게 되는지 모릅니다. 한번도 그 까닭을 자신에게
따져 물어본 적도 없습니다. 조금만 따져 물어보았다면 고독해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고 싶어하고 놀이를 즐기려 하고 갖가지 오락에 빠져드는
것은 고독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구루, 종교 의식, 기도, 신간 소설도 고독에서
도피하는 수단이 되어 줍니다. 내면적으로 고독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구경꾼이 됩니다.
고독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할 때에야 자신의 삶을 사는 연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결혼하고, 다른 사회적 관계를
촉구합니다. 혼자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결혼한다거나, 혹은 무료해서 직업을, 자신을 잊는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끝없는 오락의 추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고독의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독 너머에
참으로 진기한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세요. 고독과 홀로 있는 상태는 서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아직
고독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단 나이든 사람들은 잘 압니다. 고독감이란,
소외되었다는 느낌, 뚜렷한 까닭 없이 갑작스럽게 두려운 느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의지할
데가 없다, 오락이 자폐적 공허감을 메워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고독을 느낍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고독감을 느끼면서도 이 고독감을 이해할
때 느껴지는 일종의 자유로운 상태가 바로 이 홀로 있는 상태입니다. 홀로 있는 상태에서는
심리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이상 즐거움이나 위안, 만족
을 때가 바로이럴 때입니다. 창조적인 마음은 오직 이런 마음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이 교육의 일부여야 합니다. 고독의 아픔,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비어 있다는 느낌에 과감하게 맞서며,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라디오를 켜지도 않고, 일에 몰두하지도 않고, 영화관으로 달려가지도 않고, 이를 직시하고
뛰어들고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근심 걱정을 해 보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우리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갖가지 형태의 오락 및 놀이를 통해 - 섹스를 통해, 신을 통해, 일을 통해, 술을
통해, 시를 쓰거나 익혀 둔 주문을 외는 행위를 통해 - 이 근심 걱정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독의 고통이 밀려오면, 맞서 보세요. 도망치려 하지 말고 바라보세요. 도망치면,
절대로 이 고독의 아픔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제고 어느 때고 이 고독의 아픔은
길모퉁이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고독을 이해하고 이를 넘어서면,
여러분은 도망칠 필요가 없으며 놀이를 통해 다른 형태의 만족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마음은 굉장한 풍요를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넉넉함은
부패하지도 않고 타인에 의해 손상을 입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일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의 일부입니다. 학교에서 그저 시험에 합격하는데
필요한 과목만 배운다면 배움 자체는 고독을 피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여러분을 가르치는 분과 조금만 이야기해 보면, 여러분은, 그들이 얼마나
고독하고 자신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고독한 사람, 생각과 마음이
고독의 아픔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입니다. 이들만이 스스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만이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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