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진실로 명하는 바에 따라서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우며, 오히려
전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회의 목적,
또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그저 <형식적>으로 그런 종교를 지켜 나가기보다는
차라리 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자신이 이 지상에 재림하시는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처음 오셨을 때와 마찬가지로,<온 예루살렘>이 몹시
놀랄 것이다.(마태복음2:3,7:28) 그렇지만 기독교를 정말로 평생 자기 것으로
한 사람들이 위와 같은 견해를 마음에 품었다든가, 더구나 공언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경우는 신앙생활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그에 수반하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 생활은 처음에는 다소의
과감성을 가지고 시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차츰 나아감에 따라서 그렇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것은 좁긴 하되 평탄한 길이며, 거기에는 많은 휴식처와
열린 문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산상수훈>이라 하여 그 개요만이 전해지고 있는 성구를 한 번
주의 깊게 읽어 보라. 그리고 당신도 그 가르침에 경탄하는가, 아니면 그것들
모두를 소위 <이상적인> 명령, 즉 이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되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가를 검토하라. 당신이 내적으로 진보하느냐
아니냐는 이 검토와 그 대답에 달려 있다. 당신이 이 모든 가르침에
따를 수 있도록 하고, 적어도 강력하게 원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당신에게
있어서는 인연이 없으며, 차라리 뭔가 교회 제도든 철학이든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는 없다.
만일 신이 실재하지 않고, 다만 이 세상에 다윈의 의미에서와 같은 자연사적
질서와, 인간 상호간의 단순한 <생존 경쟁>과 사회적으로도 <실리 정치>외엔
다른 것이 없다면, 산상의 수훈에 따라서 생활의 규칙을 세우거나, 그것을
자기 혼자서 지키려 드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신이 실재하고, 그 명령에 충실히 따를 때에 신의 축복이 주어지되,
그렇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다행히도 이것은 누구나
시험해 볼 수가 있다. 지금 당장 믿고 시작할 필요는 없다. 머지 않아서,
이미 유물주의에 싫증이 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험하게 될 테니까.
<요한 복음 7:16.17.46, 8:12.47>
당신이 복음서의 이러한 문구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을 읽는다면
기독교는 정신적으로 이 가르침을 이해할 힘이 없었던 몇 세기 동안에 쌓였던,
피상적인 교회 만능 주의의 누적된 짐으로부터 해방되어, 각 개인에 의해서
전혀 새롭게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면서까지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오늘날에는, 기독교에의
복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가 갖는 내적
탁월성 때문에 더욱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굳게 이에 마음을 바칠 것이다.
-이러한 시대가 바야흐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