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6:65(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9:39(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에 대하여 우리는 이 세상의
생활에서는, 신이 무엇인가를 알 도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나 성령이
무엇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이에 대하여 교리문답서나 교리교본에 씌어 있는
모든 것은, 요컨대 다소라도 올바른 구성력을 가진 인간의 관념에서 나온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보다 터럭만큼도 더 아는 게
없는 교회의 어느 교사의 견해를 듣더라도 이해되지 못하므로, 신이나
그리스도나 성령의 존재에 대한 것 따위는 집어치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신의 확실한 존재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힘에
대하여, 또 우리의 영과는 다른 영의 빛의 본성에 대하여 우리들 자신의
경험을 갖지 못했다면, 그와 같은 인간적인 교조에 대한 죽은 교회적 신앙
이외의 것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그런 것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그같은 신앙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가 이러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생각했던 대로의, 또 생각해
주기를 바랐던 대로의 견해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에 굳게 의지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무튼간에 많은 사람들의 안심을 위해 덧붙이면, 신앙고백 속의
교회의 공식적인 말은 대체로 그런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는 진리에
가까운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의지하고 있으면 순전한 사도로 나가는 일은
없지만, 거기에서 빗나갈 경우는 위험한 길에 빠져서 도저히 일반적 승인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은, 그밖의 점에서는 참으로 훌륭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도
아직 친해질 수 없는 것이며, 약간 무섭고 거의 기분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항상 파수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산 진리의 영으로서, 정녕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나 사물을 보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따라 다니는 순전한 거짓이나 혹은 반 허위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이 영을 부여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이 깃들었던 사람중에서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가 바울의 갈라디아서 5:22(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선행과 진실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를 참조하면 그에 따라서 이 영이 당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부에 이미 깃들고 있는가 어떤가를 쉽게 판단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설사 그 영의 깃들음이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나 혹은 약하거나 할지라도
역시 당신은 그로 인해 이미 <신의 자녀>이며, 확실한 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는 같은 편지3: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나니...)에서 결점이 많은 갈라디아인들에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음이 약해졌을 때의 큰 위안이다.
대다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받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에 잠기는데, 이런 생각은 자신이 넘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로운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불안은 이따금 생각이 모자라고 너무도 열심인
참회설교사에 의해서, 또 성서나 교리문답서의 각 장구의 오해에 의해서 한층
심해지는 일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성서에 나와 있는 가장 확실한 말씀은, 이미 누차
언급했듯이 요한복음 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과 마태복음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에 내포되어 있다. 이 경우
성실히 구하는 자에게는 어떤 예외도 없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말씀(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도나 예언자의 말까지도 무조건이 아니다)을 완전히
이해하고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며, 자기안에 그에 대한 반항심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이 자연의 감정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구원의 표적이다.
그리고 그 뒤에 그리스도를 그 모든 행적이나 말씀에 있어서 다른 모든
역사적 현상보다도 이해할 수가 있고, 또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나 그 뒤의
교부들, 모든 고전작가나 고대의 위인들, 중세의 신비가나 종교개혁자, 혹은
근대의 철학자나 신학자들보다도 그리스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도 이를 수가 있다. 본래 이것만이 완전한 기독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