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6. 해탈이란 무엇인가?
별관신사
2013. 6. 2. 07:46
6. 해탈이란 무엇인가?
의학은 의술의 바탕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과학은 죽는 방법의 토대가 된
다. <티벳 死者의 書>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죽음
의 과정을 탐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명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 자리에서 해탈'이
라는 말에서 '해탈'이란 무슨 뜻일까?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가 비어 있다는 뜻인가? 아
니면 자유라는 뜻인가?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
는 위대한 책>이 약속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해탈'이란 일종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기쁨'이나 '현상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 또는 '고통의 단절'을 의미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불교는 과연 현실 도피적인 종교이며 <티벳 死者의 書>는
현실 도피를 위한 일종의 처방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불교 자체에도 해탈과 자유에 관한 이론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4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중에서 3번째인
니로다(nirodha)의 문자적인 뜻은 '단절'인데, 고통의 단절[滅]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얻
은 사람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실재 상태를 가리키는 니르바나[涅槃]라는 말의 문자적
인 뜻은 '(촛불이) 꺼짐' 또는 '사라짐'이다. 붓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지적인 금
욕주의가 퍼져 있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였다. 금욕주의자들은 깨달음이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속박에 넌더리를 치며, 강력한 초월적인 사마디[三昧]를 통해 몸
과 마음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붓다가 이원적인 냄새가 풍기는 니르바나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붓다는 니르바나가 마치 금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갈구하는 최종적인 초월
상태인 것처럼 말했다. 그가 그런 가르침을 펼 때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한 붓다였다. 그는 인도 전역을 돌면서 가르침을 펴는 동안에도 결코 니르바나에
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궁극적인 니르바나(parinirvana)'라고 했다. 그러나 그
것은 자유와 해탈을 일종의 현실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이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자기 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한데 - 자기라고 하는
고립된 존재가 있으며, 습관적으로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들 속에는 망각에 대한 은밀
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들에게는 망각이 혼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런 망각 상태에 도달하면 소란스러움도 없고,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가족도
없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괴로움도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기쁨을 맛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들은 위험한 요소나 상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망각 상태에
이르면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이 잊혀질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 중에는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적인 절멸주
의와 현실 도피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현실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강하게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것은, 근본적으로 망각에 대
한 두려움이 그들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망
각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따라서 망각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지옥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은 씨가 먹히지 않는
다. 반면에 자멸을 초래하는 전쟁이나 마약 중독 또는 니코틴이나 알코올 중독을 통해
멸망을 향해 치달리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지금 이러한 절멸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
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런 절멸주의자
들의 행동은 단절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 상황이 이러하므로, 니르바나를 마치 행복감이 넘치는 지고
한 망각 상태인 양 말하는 것은 상당히 기민하고 효과 있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
히 무(無)를 탐닉하고 공허한 사마디를 추구하는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이끌어 들인 다
음, 사라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무지와 오해와 에고에 대한 집착과 주관과 객관을 가르
는 망상일 뿐임을 알려 주어, 그들의 삶이 영속적인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바뀌
게 된다면 이 방법이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지 않겠는가. 에고라는 올가미를 뒤
집어쓰고 누리는 세상의 자그마한 행복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누리는 행복
에 비하면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의 껍질을 깨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궁극적인 희열
이 보너스로 따라 온다. 이 희열이 진정한 의미의 해탈이고 자유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독립된 고정 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와 사물이 무한하고 영
원한 관계의 그물로 짜여 있음을 안다. 무와 망각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운
명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다른 존재들과 끝없이 얽혀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행복을 서로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 시작된다. 그
렇게 나누고 베풀어도 자신이 누리는 궁극적인 니르바나의 자유와 희열은 조금도 줄어
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과 사랑의 결합을 하는 것과 자신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기쁨이 하나라
는 사실은 이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기쁨
을 자발적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위해 바치는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안
다. 단절, 소멸, 종결, 그리고 자아 도취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행복과 참 사랑과 무한
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티벳 死
者의 書>의 저자가 말하는 '해탈'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그러나 이러
한 삶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티벳 死者의 書>가 말하는
해탈을 죽은 다음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유물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일종
의 망각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해탈이 만약 그런 종류의 망각이라면 그 세계에 대
한 과학적인 탐구나 삶을 변형시키는 가르침은 필요성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으리
라.
요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속하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8장을 보라)에서 뽑은
짤막한 철학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교
가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해탈, 니르바나, 진리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 점의 시간의 문을 통과하려면 -
과거는 맑고 텅 비어 자취도 없으며,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것이며,
현재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시간이 이러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볼 때,
투명한 보는 행위만 있을 뿐
보이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투명한 바라봄이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밝은 지성이다.
이 지성이 바로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맑은 공(空)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공(空)이다.
이 상태는 어떤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양한 것이 동시에 식별된다.
따라서 일종의 단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생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각성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이 구절은 니르바나의 궁극적인 실상을 묘사하고 있다. 니르바나는 '위대한 완성'
의 영역이자 진리의 영역이다. 또 궁극적인 자유와 해탈이며, 불성(佛性)을 향한 진화의
정점이다.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에 담겨 있는 모
든 가르침의 목적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보면 니르바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 아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니르바나는 모든 현재 상황의 내적인 본질
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보는 행위 자체를 주시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속에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
변의 독립된 알맹이가 있고, 그대의 생각과 행위가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
러나 관점을 180도 바꿔서, 보는 행위 자체를 보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대라고 하는 고
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데카르트도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식 주체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발견할 수는 없
지만 인식 주체라는 알맹이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 행위가 일어난다고
거칠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
서는 의심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발언은, 끝까지 의심하기를 포기한 게으른
불교 철학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보는 행위 자
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는 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야 한다.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 나
가다 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별이 사라지고, 보는 행위만 투명한 상태로 남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투명성은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간다.
인식 주체는 발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면 대상
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다른 대상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보는 행위 자체를 응시하는 통찰 속에서는 주관
과 객관의 분별이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로 투명하게 존재한다. 이 투
명성이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며, 직접적이고, 비이원적이며, 어떠한 고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비어-있음[空]이면서도 비어-있음[空]이라고 규정할 수 있
는 그 어떤 고유한 성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명료한 지적인 각성은 멸절되지도
않고 망각되지도 않는다. 또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거나 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그런 이원성의 실재가 아니
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 자유로운 상태를 맛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본성인 영원 불변의 금강실체(金剛實體)이
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붓다이다. 불성(佛性)은 힘들여 만들어 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이미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소멸되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영역이 아니라, 모든 존
재와 사물이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비어-있는'[空] 영역이다. 영혼 속에는 아무 것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투명한 비어-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
을 나누는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
도다.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진리의 몸(지혜와 자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깨달은 몸
(기쁨과 희열), 그리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나투는 몸(자비와 사랑)은 동시에 다른 존
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유와 기쁨과 사랑임을 깨닫도
록 돕는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
는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와의 이 객관적인 동일시 속에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붓다의) 세 몸이 온전히 담겨 있다.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의 몸,
빛과 자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깨달은 몸,
모든 곳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나투는 몸이
그 속에 하나로 깃들어 있다.
이 셋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것이
곧 실재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티벳 死者의 書>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해탈이 망각이 아니라는 사실
이 분명해진다. 진리의 몸은 우리들 저 너머에 초연하게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그 몸
은 우리들 내면에서 무한한 지혜의 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아름다움 속에 거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고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에고에 중독된 처량한 존재들을 사랑과 자비
의 힘으로 끌어안고 있다.
사람들은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인, 연꽃에서 태어난[化生] 파드마 삼바바를 붓
다의 세 몸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였다고 믿는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시나 읊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인간 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실제적인 통로를 알려 주었다. 그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
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의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실체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지금 그대의 각성이 바로 실체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본성이 아무 꾸밈없이 명료한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의 본성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깊게 생각할 마음이라는 대상도 없고,
그대의 지성이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마음 속에 이미 생각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깨닫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대는 왜 "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지금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왜 "나는 고요히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명료함, 각성,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왜 "수행이 효과가 없다"고 수행을 들먹이는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자발적인데,
그대는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생각과 해탈은 동시적인데,
그대는 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대의 지성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이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을 해탈과 연결시키고 있다. 표현도 아주 단
순 명료하다. 이 구절들은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의 가르침과 마
찬가지로, 에고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 그런가'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공백을
만들어 준다. 그리하여 에고를 벗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 각 구
절은 에고의 독단과 자기 연민 그리고 스스로 해탈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도전하면서, 동시에 지겨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든든한 토대 위에 서도록 유도
하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영적인 허무주의를 강화시키는 내용으
로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비어-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알고 '해탈'과 '망각'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 가르침은 전혀 해로울 게 없다.
이제 지금까지 쌓은 토대를 발판으로, 티벳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는 창조적으로 죽
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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