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명상. 180

선택없는 깨어있음은 모크샤.

선택없는 깨어있음은 모크샤 절대적 자유이다. 지옥은 속박이며 천국 역시 속박이다. 천국은 아름다운 감옥일지 모른다. 지옥은 추한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감옥이다. 기독교도 마호멧교도 이 점을 다를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천국이 그 궁극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그들에게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틀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천국에 신과 함께 있다고, 이것은 전적으로 틀리다. 만일 예수가 천국에 있다면 그렇다면 예수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모크샤에 있다. 나는 말한다. 그는 천국에도 지옥에도 있지 않다.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선과 악 죄와 덕 도덕과 부도덕 그는 자유롭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선택없는 삶을 산다. 그리고 이것이 곧 ..

오쇼의 신심명 강의중.

遣宥沒宥 견유몰유 從空背空 종공배공 多言多慮 다언다려 轉不相應 전불상응 絶言絶慮 전언절려 無處不通 무처불통 to deny the reality of things is to miss their reality to assert the emptiness of things is to miss their reality the more you talk and think about it the further astray you wander form the truth stop tlaking and thinking and there is nothing you will not be able to know. 사물의 실체를 부정하면 그것들의 실체를 놓치고 사물의 공을 따르면 그것들의 실체를 등지느니라 진리에 디하여 말이 많고..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의 동물들은 신경계가 지극히 복잡하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계의 경고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고도로 발달된 뇌는 고통을 낳는 데도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오직 인간만이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실망하고 좋아 하는 것을 잃을 때 좌절한다. 인간은 고통 그 자체 때문에 고통 받는다. 아픔 분노 죽음에 고통받고 눈을 뜨면서 부터 갖가지 고통때문에 불행해 하며 매일매일이 불행 하다. 이런 고통은 우리가 격는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족에 해당하는데 이는 뇌에서 형성된다. 즉 고통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준다. 만약 고통이 원인이라면 치유의 원인도 될 수 도 있..

신심명강의

止動歸止 지동귀지 止更彌動 지갱미동 唯滯兩邊 유체양변 寧知一種 녕지일종 一種不通 일종불통 兩處失功 양처실공 무위를 성추하고자 행위를 멈추려고 할 때 바로 그 노력이 행위로 가득 채우나니 이쯕 저쪽 어느 한 극단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그 하나를 알지 못하리라 그 하나 속에 살지 않는 자는 행위와 무위를 모두 이루지 못하리라. 무위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노력은 행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무위가 되려고 노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전체적으로 행위하라. 그러면 무위가 따라 온다 무위는 그림자 처럼 따라 온다. 완벽하게 생각에만 열중하라 그러면 무념이 따라 온다 그대는 사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떨쳐 버릴 수 없다. 오직 완전함 만이 모..

신심명 강의 .

승찬의 신심명 중. 莫遂有緣 막수유연 勿住空忍 물주공인 一種平懷 일종평회 泯然自盡 민연자진 바깓 세상에 연연하지도 공의 내지각에 빠지지도 말 지어다 사물의 일치속에 거스르지 아니하고 잠잠하면 허상이 저절로 사라지리라. 그대는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외부이고 배고픔은 내면이다. 그대가 그렇게도 내면을 원한다면 왜 외부의 음식 을 취하는가? 만약 그대가 내면만을 원한다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취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거기에 내면의 음식이란 없다. 배고픔은 내면이고 음식은 외부이다. 그러나 음식이 들어오면 어딘가에서 그 상황이 변화한다 음식이 그대의 뼈가 되고 살이 된다. 음식이 바로 그대의 마음을 만들어 내는 원료가 된다. 음식이 그대의 사념이 되는 것이다.따라서 만약 음식이 그대의 사념이 될 수 ..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은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은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 들이니까. 잘랄루딘 루미.

초대.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이 몇살인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만 당신이 사랑을 위해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할 자신이 있는가를 알고 싶다. 어떤 행성의 주위를 당신이 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슬픈의 중심에 가 닿은 적이 있는가 삶으로부터 배반당한 적이 있는가 또한 앞으로 받을 더 많은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은 적이 있는가 알고 싶다 나의 것이든 당신의 것이든 당신이 기쁨과 함께 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미친 듯이 춤을 출 수 있고 그 환희로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까지 채울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이나 나에게..

다가 감.

우리가 제 아무리 다른 사람속으로 뛰어든다 해도 그의 영혼을 터치할 수는 없다. 그저 겉돌 뿐이다. 바다를 제대로 알려면 뛰어드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다를 제대로 알려면 마치 소금을 뿌리면 녹아서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 처럼 바다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바다의 깊이를 알려면 이렇게 바다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외 다른 방법은 없다. 타인을 상대로 앎(knowledge)에 대한 참다운 체험을 할 수 없다. 오직 자아를 상대로만 앎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둔 채로 살아 간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때 조차도 상대의 내면 깊은 곳 까지 닿지 못한다. 항상 주위에서 맴돌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내면의 체험에 관한 지혜를,

내면의 체험에 관한 지혜를 많은 사람들이 물으려 온다 꿀맛을 본 이는 벙어리가 되고 마는데 어떻게 꿀맛에 대해 애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물에 대해 많은 정보를 긁어 모은다. 이는 외부로부터 주워 모은 지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방으로 부터 사물을 지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힌두의 신전에 가면 신상의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것은 그져 피상적인 의식에 불과하다 외부로부터 아무리 많은 것을 긁어 모은다 하더라도 그런 지식은 내면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의 고유한 체험과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무엇이든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가 긁어모은 지식은 표피적인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다에 가서 파도만 보고 돌아오는 것과 같다 이 진짜 바다의 심원한 보물은 파도속에 감추어져 있다. 바다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기도와 수행에 의존하고 종교와 경전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착하고 스스로 파하고 스스로 통찰하여 자각하는 것만이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 깨어남 깨어있음으로 인해 신과 진리의 삶과 자기 자신과의 포괄적인 상관관계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를 고집하지 않는것이 상식이자 순리입니다. 불멸의 자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