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명상. 180

깨달음과의 만남이 그토록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깨달음과의 만남이 그토록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중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원이란 단어 자체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영원을 아주 긴 시간 예컨데 수백억년 넘도록 끝없이 계속해가는 시간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비가는 영원을 전혀 그런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적으로 시간 밖에 존재하는 자각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이란 과거도 미래도 이전도 이후도 어제도 내일도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무시간적인 순간이다. 합일의식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인 순간 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 산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오염만큼 신성한 빛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마이스트 에크하..

대지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대지위에 자신의 몸을 던져 어머니인 대지위에 몸을 눕히면 당신은 그녀와 하나이고 그녀가 당신과 하나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대지처럼 확실히 안정되며 불사의 존재가 된다. 실재로 당신은 대지보다도 수천배나 확고한 불사의 존재이다. 내일 그녀가 당신을 집어삼킬 만큼이나 확실히 그녀는 새로운 당신을 낳을 것이고 당신에게 한번 더 새로운 고통과 노력을 안겨줄 것이다. 단지 어느날 만이 아니라 지금 오늘 그리고 매일 그럴것이다. 한번만이 아니라 수천번이나 어머니 대지는 당신을 집어 삼키고 또한 당신을 낳을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끊임없이 영원한 것이다. 캔 월버의 무경계 중.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많이 이야기 한다.

그런데 아무도 보리달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제자들이 독살을 기도 했을 때 의식을 잃고 무덤속에 묻혔다가 나중에 의식을 되찿고 무덤을 빠져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발 한짝은 무덤속에 남겨두고 다른 한짝은 주장자에 걸고 그곳을 떠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보리달마는 히말라야 만년설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아무런 무덤도 사원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보리달마는 자신이 죽은 뒤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죽어서 숭배를 받고싶지 않다. 이는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네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이리라.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는 영원한 히말라야 만년설 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오..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실재가 무경게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nirvanna) 해탈(moksha) 해방(rellease) 깨달음(enlightenment)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 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 부터의 해방이다. 이 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통상 합일의식이라고 불리는 무경계 자각을 탐구할 준비가 된 셈이다. 캔월버의 무경계 중.

모든 사물은 공이다.

모든 사물은 공이다. 모든 사물은 둘이 아니다. 또는 모든 사물은 상호 침투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차이점을 부정하고 개별성을 무시하고 세상을 온통 한데 뒤섞인 걸쭉한 액체처럼 묘사하려는게 아니다. 세상은 온갖 유형의 특징과 표면과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단일한 무봉의 장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라. 당신의 손은 분명 머리와 다르고 머리는 다리와 다르고 다리는 귀와 다르다. 하지만 그 모두가 한몸을 구성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체가 다양한 부분들로써 스스로를 표현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경계의 영토에서는 모든 사물과 사건이 똑같은 하..

실재란 사고(思考)의 공(空)이자 사물의 공(空)이다.

실재란 思考의 空이자 사물의 空임을 견지하는 불교의 심오한 空의 교의이다.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은 서구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것 처럼 사물이란 단지 경험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경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思考의 空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가 정상적인 지도제작이고 실재 위에 경계를 덧씌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사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와 사물화(事物化) 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위해 던진 경계라는 그물에 붙인 두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캔월버의 무경계 중.

실재는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재는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실재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뒤에 무라는 순수한 진공 분별할 수 없는 일원성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즈키 선사는 공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언급한다. 공은 다양성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산이 있고 벚꽃이 반발하며 가을 밤 달빛은 휘영청 밝게 빛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적 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들은 자신이 아닌것들 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된다. 세계의 경계를 공으로 볼 경우 모든 사물과 사건이 모든 대립과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핵심이다. 즐거움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고 산은 악과 삶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

철학은 상대적으로 하나의 속임수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의 제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이웃이 악한 이며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대가 이를 곧바로 믿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악한이며 부도덕하다면 그대가 갑자기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그대의 이웃이 도덕적이며 성자연 한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를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증거를 대봐 !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그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는 우리 이웃인데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아 하고 말한다. 누구인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적의에 찬 의견을 말할 때마다 그대는 이를 즉시로 믿는다. 그대는 결코 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 세상에 쑥덕공론이 그렇게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

그대가 사랑으로 각성으로 명상으로 충만할 때.

그대가 사랑으로 각성으로 명상으로 충만할 때 그대는 이 세상이 텅 비어있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대를 텅 비우고 바라보면 모든것이 텅 비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대가 텅 빈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것이 비게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물에다 그대 자신을 가져왔던 것이다. 만일 그에게 아무 사랑도 없다면 그때 그대는 이 세상에 아무 사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으로 뛰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모든 곳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나무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강에서 사랑이 뛰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이를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만을 느낄 수 있을 뿐 그밖에 다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오쇼의 신심명 강의 중.

어느 과학자가....

어느 과학자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고 매우 주의깊게 나무를 관찰하고 있었다. 비록 그대의 생각뿐이라 할 지라도 나무는 이를 알아 차린다. 그는 식물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식물을 가는 철사로 칭칭 감아 식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정교한 기계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지금 나무를 싹 베어버린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기계의 바늘이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 식물이 사념(思念) 을 수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식물을 자르지도 식물에게 집적 해를 주지도 않고 그냥 상상만 하였다. 그런데도 식물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의 바늘 침은 그 식물의 심한 걱정이나 분노를 나타내 주는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