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명상. 180

참된 주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어진 환경을 바꾸는 것 만의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도 능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지금의 나에게 운명이 있다면 운명을 받아 들이는 것도 능동적 이며 운명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저항하며 바꾸려는 것도 능동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모든것이 능동적 으로 보일수가 있는 것은 모든 일과 모든 것이 하나의 뜻이자 하나의 자유의지 즉 나의 뜻과 의지이자 내 마음 먹기로 인해 비추어져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어나는 모든 일과 드러나는 모든 것이 능동적인 이유는 내가 즉 나가 오직 유일한 능동적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간다고 느끼고 있는 지금의 나만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면 꿈이 꾸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로 인히 겪고있는 모든 일 또..

나는 생각의 주인이다.

너는 생각의 주인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주인인 나에게 영향을 미칠수가 있으며 어떻게 나 자신으로써의 고요의 정적을 깨트릴 수 있겠습니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족 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어떻게 생각의 주인을 규정하며 속박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구속이 자유를 속박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자신을 바로아는 것이 참다운 평안이며 참다운 만족이며 행복일 것입니다. 불멸의 자각 중.

깨달은 이를 찿아가 보라.

참다운 지혜를 얻은 이를 찿아가 보라. 그가 말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 그저 깨어 있으라. 그리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 깨달은 존재는 피안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 깨달은 이의 참 존재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다. 깨달은 존재는 꿀을 먹은 벙어리와 같다. 그는 그가 깨달음을 맛보고 미소지을 뿐이다 사트 상(satising (사트(sati)는 진리를 상(sing) 은 모임이나 회합을 뜻함) 이라는 말은 깨달은 이의 발아래 앉아 있는 것 스승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을 뜻한다. 꿀을 맛본 사랑의 꿀을 맛본 이의 발아래 앉아 있으라. 사랑을 맛본이의 삶은 엑스터시로 넘쳐 흐른다. 삶의 꽃이 만발해 있다. 그 향기에 취해 보라. 그 맛에 빠져보라 그 기쁨속으로 철저히 녹아 들어가라 그가 말하는 것에 매달리지 ..

신의 이름으로 깨어나 황홀경을 노닐며...

신의 기름으로 깨어나 황홀경을 노닐며 신 앞에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이 넘쳐 흐르는 흥겨운 잔치 해탈을 집착하는 이는 누구인가? 왕이 됐던 평민이 됐던 머리를 놓은자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에고를 버린자는 엑스터시로 넘쳐 흐른다. 사랑이 자신의 숨구멍 하나를 통하여 펴져 나간다. 깨달음을 집착하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해탈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해탈을 얻게 해 달라고 열반에 이르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해탈에 신경쓰는 자는 누구입니까? 저는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라고 기도한다. 신을 향한 참다운 헌신자는 해탈에 대해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참다운 헌신자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한다. 신을 향한 참다운 헌신자는 당신을 보고싶습니다 당신..

온광이 대주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태어나실 곳을 알고 계십니까? 대주가 말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다시 태어남을 논하는 것을 무슨 소용인가? 태어남을 아는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탄생을 떠나 태어나지 않는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조사께서도 탄생을 거치는 그것은 실재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온광이 물었다. 자신의 성품을 보지못한 이도 그렇습니까? 대주가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성품의 보지 못했을 뿐이지 그 성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보는 것 자체가 성품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무수한 현상을 만들어 내는 그것을 법성(法性- dhama nature)라고 부르며 또한 법신(法身- dhama kaya)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명조사(馬鳴組師)도 말씀하시기를 현상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실재로 말하는..